존 스튜어트 밀은 어린 시절 모험담 등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읽었다.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 존에게 비상한 환경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싸워 나가면서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의 정력과 재질을 잘 그려낸 책들을 손에 쥐여 주기를 좋아했다. ‘아프리카 탐험기’와 ‘세계일주 항해기집’ 등과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책들을 통해 모험심과 어려움을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우리 아이가 천재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영재교육’도 부모라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특히 자녀를 영재나 천재로 키우고 싶은 것은 부모의 자연스러운 욕망이기에 부모라면 누구나 조기 영재교육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세계적으로 회자하는 조기 영재교육의 성공 사례인 칼 비테(1767∼1845)의
조선을 구한 이순신과 로마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카이사르와의 공통점은 전쟁터에서 전황을 기록한 것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긴장의 순간에도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덕분에 카이사르는 8년간의 갈리아 전쟁을 온전히 기록한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를 후세에 남겼고, 이순신은 임진왜란 전쟁기인 ‘난중일기’를 7년 동안 써 후세에 전했다
‘열자(列子)’에는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나온다. 지음이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말한다. 친구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 친구의 마음속을 척하니 알아맞힐 정도로 상대방을 다 아는 사이를 말한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이 세상에는 더 이
사람 사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형편이 어렵다고 자녀들에게 교육기회도 주지 않고 돈벌이로 내모는 부모가 있는 반면에 그럴수록 자녀를 다독거리면서 공부할 수 있게 분위기를 북돋워주는 부모도 있다.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마리 퀴리(1867~1934)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교육에 나섰다. 두 딸은 둔 퀴리 부인은 요
1860년대 프랑스에서 자녀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지적 발달이 늦다는 것을 알고 직접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학교에 보내면 교사에게 구박을 받아 오히려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작은아들 피에르를 고등학교 과정까지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쳤다. 형 자크 역시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
강영우 박사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진석)이 초등학교 때 영재학급에도 못 들어가는 등 거듭된 실패로 자아 개념이 극도로 손상된 적이 있었다. 이때 흔히 우리나라 부모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은 탓’으로 돌리곤 하는데 둘 다 교육자인 이들 부부도 그랬다. 진석이의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실력을 기르고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만 애를 썼다. 스쿨
1944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 때 눈에 축구공을 맞아 실명했다. 아들의 실명 소식에 충격을 받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누나가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다 과로로 숨을 거두었다. 결국 3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열세 살이던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아홉 살이던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가야 했다. 그는 맹인재활원
세계적 명문가들은 가정에 항상 책의 향기가 묻어나오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부모들은 집안에서 늘 책을 읽고 그 모습을 자녀는 보고 자란다. 처칠은 어린 시절 아버지(재무장관을 역임한 랜돌프 처칠)가 에드워드 기번의 역사 책 ‘로마제국 쇠망사’를 애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페이지에 어떤 문장이 있는지조차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연설하거나 글을 쓸 때
“이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다. 최소한 만지기라도 해라.”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꼽히고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윈스턴 처칠(1874~1965)이 남긴 명언이다. 처칠의 책에 대한 예찬은 짐짓 미소마저 짓게 한다. “쓰다듬고, 쳐다보기라도 해라.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아무거나 눈에 띄는 구절부터 읽기 시작하는 거다.” 처칠은 수상록 ‘폭풍의 한가
백곡 김득신이 끝까지 과거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합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평소 총명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 아들이 비범하지 못하고 평범한 아이들보다 어리석은 듯 보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노둔’하다고 표현했다. 한마디로 어리석고 우매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똑똑하고 총기가 있기를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한결같은 소망인데 소년
실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나이 50세에 우의정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종9품의 미관말직을 받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요즘의 국토해양부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연암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는 64세에 이르러 양양부사에 올랐는데 15년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종3품에 오를 수 있었다.
또
700여년 케임브지리대학 역사상 최초의 ‘형제 교수’를 영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배출했다.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경제학)와 장하석 교수(과학철학)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처음 접하고 놀랍기만 했다. 학문적 영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도도하기로 이름난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형제 교수가 한국인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이들의 아버지인 장재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캘리포니아에서 금맥이 터졌지만 정작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은 다름 아닌 청바지라는 대박 상품을 만든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1829~1902)였다. 1829년 2월 26일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포목상 점원으로 출발했다. 18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먼저 뉴욕에 와서 자리 잡고 있던 이복형의 가게에서
영어나 수학 공부에 순서가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공부에 순서가 있었다. 사서는 기본적으로 대학-논어-맹자-중용 순이었다. 이는 주자학을 정립한 주희(주자)가 주장한 것이다. 주자는 사서를 읽기 전에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기본을 먼저 배워야 한다며 책을 펴냈는데 그것이 바로 소학이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 독서장에서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
지난해 이맘때쯤 나는 우연히 지인의 소개를 받고 서울 종로5가 연강홀 앞에 있는 한 한의원에 간 적이 있다. 한 번은 원장실에서 빼곡히 적힌 경구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잠을 깨고 독서하라’라는 문구는 1997년 9월 11일이라는 날짜 표시와 함께 책장에 포스팅돼 있었다. 김효영 원장은 “이 문구는 자신의 모교인 경동고교 도서관에 걸려 있다”면서 고교 시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주옥같은 이 말을 남긴 헤르만 헤세(1877~1962)는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소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와 같이 ‘입시지옥’이나 ‘입시전쟁’이라는 말이 나도는 현실에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헤세가 29살 때인 1906년 쓴 이 작품은 또한 신학교
“혼인길이 막혀 비천한 집안과 결혼해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이 난다. 이래도 학문을 게을리할 작정이냐.”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다소 ‘세속적’인 비유를 동원하면서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했는데 오히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을 더 진솔하게 느낄 수 있다. 당시 두 아들은 아버지가 대역죄인으로 몰려 한순간에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 중 엄하면서 다정다감한 아버지를 꼽으라면 다산 정약용이 아닐까. 다산이 유배지 생활을 시작한 것은 39살, 유배 생활을 마쳤을 당시 나이는 57세였다. 한창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할 시기에 아버지로서 함께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자녀들에게 미안함이 컸을 것이다. 그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달래려 18년 6개월 동안 유배지에서 그는 자녀들
흔히 자녀교육에서 강조되는 게 바로 역할모델(role model)이다. 자신이 꿈꾸는 일을 이루기 위해 먼저 그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 정진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바로 역할모델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주변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을 역할모델로 정할 것을 강조하곤 한다. 역할모델은 비단 자녀에게만 필요한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