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무관에 임명된 이후 강등이 되풀이됐다. 이때 유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변방의 평범한 군졸로 인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45세에 정읍현감이 되었고 46세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 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유성룡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 후에 그에게 중요한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3월 초 5일(을축) 맑음. 동현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저물녘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란 책을 보내왔다. 그것은 본, 즉 해전, 육전과 화공 전략 등에 관한 것을 낱낱이 말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특이한 전술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것 중 특이한 것은 해전과 화공전에 관한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일 이순신이 해전에서 화공법을 자주 사용하는 사례를 통해 볼 때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다. 유성룡은 단지 인물을 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귀중한 책까지 보내주었다. 어린 시절 한동네에서 살던 게 인연이 된 이순신과 유성룡의 ‘지음’ 관계야말로 조선을 구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순신은 을지문덕 등 역사적 인물과 중국의 역사책인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읽으면서 국방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달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문과 대신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백성도 역사도 그 이전에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이순신이 무과로 직업을 바꾸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의 국민은 매우 흉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입법자나 집정자는 국민에 대해 아무런 신뢰도 가질 수 없었다. 즉 그들은 국민의 눈앞에 재판관과 위협과 벌만을 놓았다.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의 취조에 맡겼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1748년)에서 “일본인은 흉악한 민족성을 지녔다”고 갈파했다. 그 흉악성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또 강점하고도 이를 미화하고 있다. 영화 ‘명량’으로 이순신의 삶과 리더십이 재조명되고 있다. 자녀와 손잡고 영화를 보며 꿈을 설계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방학이 되지 않을까.(계속)
신동민 기자 lawsdm@(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