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적 인물 중 엄하면서 다정다감한 아버지를 꼽으라면 다산 정약용이 아닐까. 다산이 유배지 생활을 시작한 것은 39살, 유배 생활을 마쳤을 당시 나이는 57세였다. 한창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할 시기에 아버지로서 함께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자녀들에게 미안함이 컸을 것이다. 그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달래려 18년 6개월 동안 유배지에서 그는 자녀들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통한 이른바 ‘서신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천륜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끝내는 은혜를 배반하고 의를 잊어먹고 아침에는 따뜻하게 대하다가 저녁에는 차갑게 변하고 만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먼저 가정생활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면 된다.”
구구절절 와 닿는 이 말은 다산이 두 아들에게 쓴 ‘친구를 사귈 때 가릴 일’이라는 편지 내용이다. 재물에 대해 다산은 “꽉 쥐면 쥘수록 더욱 미끄러운 게 재물이니 재물이야말로 메기 같은 물고기와 같다면서 결코 애착을 가지지 말라”고 당부한다.
다산의 편지를 읽다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 부모의 마음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아무리 일러도 모자란 듯 자꾸만 다시 말하게 되는 그런 부모의 마음 말이다. 자식으로서는 잔소리로 들릴 텐데도 말이다.
다산의 편지 중 조금 의외인 것이 있다. 다산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대학자답게 왠지 고고한 선비의 길을 가듯이 그런 자녀교육을 했을 것 같은데 정반대였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만,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다산은 대역 죄인이 된 아버지로 인해 벼슬길이 막혀 버린 아들에게 ‘문명세계를 떠나지 말라’는 편지를 1810년 초가을에 보낸 것이다. 다산이 ‘서울사수’를 주장한 이유는 정보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엔 특히, 정보의 전파 속도가 굉장히 느렸기 때문에 지방에 있을 경우 그 속도 차이가 엄청났을 것이다. 당쟁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시골에서 은둔하라는 훈계를 내리는데, 다산은 그럴수록 서울사수를 주장한 것이다. 위기에 처한 가문의 CEO로서 다산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