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다. 좋든 싫든 그렇다. 다원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이제 초등학교 문구점 앞에서 파는 크레파스에 ‘살색’은 없다. 다만 ‘살구색’이 있을 뿐이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한민족’은 이제 다민족이다. 200만 이주민이 함께 살아가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엄연한 다인종 국가다. 우리는 모두가 존엄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서로 평등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서로 다른 성별과 국적, 언어, 종교, 정치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로 가득하다. 단일민족 정체성이라는 마법에서 깨어난 우리는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하기 위해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현실을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다원화된 세상에서는 모두가 ‘정체성의 프레카리아트(불안정노동자)’로 살아간다고 표현했다.
우리 안의 다원성은 사회 발전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의 원천이다. 그러나 폭발하는 다원성을 조화롭게 공존시킬 적절한 제도적 장치 없이 우리 안의 다원성은 쉽게 사회적 차별과 혐오, 갈등과 분쟁의 형태로 분출될 수 있다. ‘차별은 나쁘다’는 도덕적 당위만으로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현존하는 차별과 혐오로부터 지켜줄 수 없다. 방치된 차별과 혐오는 더 큰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기본적인 통합과 안정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기에 많은 선진국들은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보편적 차별금지법이라는 법률규범을 통해 도덕규범의 사각지대를 보완하며 다원화 시대 사회통합의 근간을 마련한다. 어떠한 차별을 법률로써 금지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입법함으로써 법률과 정책 등 공적 체계 전반에서 일관된 차별금지 규범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차별 피해 당사자의 침해당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구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 정치권도 다원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추어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차별금지법을 입법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최초의 차별금지법은 의원안이 아닌 정부안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의 법무부가 최초로 입법예고한 차별금지법안은 2020년 6월 29일 내가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학력’ ‘성적 지향’ 등에 의한 차별금지에 반발하는 재계와 교계의 비상식적 목소리에 끝내 굴복해 위 사유를 비롯한 일곱 가지의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한 안을 최종 제출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든다면서 정작 정부가 나서서 특정한 차별들을 용인한 셈이다. 이 법안은 결국 무산되었고 그 이후 11차례나 국회에서 의원안으로 발의되었으나 15년이 흐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관 상임위에서 심사조차 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다.
우리 사회 내 여러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갈수록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누군가 차별받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차별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차별의 본질이다. ‘소수자’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코로나19의 경험은 상황에 따라 누구라도 소수자가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불확실성과 더불어 우리 안의 다원성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다. 이런 다원성이 우리에게 힘이 될지 위협이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차별금지법은 다원화 사회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지금 국회 앞에서 두 명의 인권활동가가 차별과 혐오로 인한 현재와 미래의 비극을 멈추기 위해 단식을 불사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닥쳐올 차별과 혐오의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는 것은 국회의 직무유기다. 4월 임시국회 본회의장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법은 차별금지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