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대한민국 자동차 가운데 세상을 깜짝 놀래킬만한 차는 어떤게 있었을까요? 디자인과 성능, 콘셉트를 통틀어 독특함으로 무장한, 그래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를, 우리가 만들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되짚어보면 1+2 도어 구성을 지닌 현대차 벨로스터 정도가 독특한 차로 꼽힙니다. 그나마 1+2 구성은 미국 새턴, 또 그 이전부터 시도한 바가 있었지요. 그러나 새로운 생각을 앞세운만큼 벨로스터의 콘셉트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차입니다.
지나온 시절을 더듬어 봅니다. 우리가 차를 내놓았을 때 세상 모든 메이커가 깜짝 놀라고, 그래서 우리를 따라했던 적은 많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자동차는 뒤늦게 출발한 만큼 자동차 선진국의 실수를 조심하고 성공을 추종하는데 전력을 다해왔습니다.
그런면에서 기아차 스포티지는 의미가 남다른 차입니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가득 지녔던 자동차인데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아차 아니 기아산업 스포티지의 뒷이야기를 살펴보실까요?
1990년대 자동차 시장은 3파전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쓰였습니다. 정부의 규제 탓에 뒤늦게 소형차 시장에 뛰어들었던 기아산업은 승승장구하며 승용차 시장을 확대해 나갑니다.
마쓰다 121을 베이스로 프라이드 1세대를 내놨고 선풍적인 인기도 얻었습니다. 이제 막 자동차 혁명이라 불리는 '모터리제이션'이 시작했던 무렵이었지요. 프라이드는 그 신호탄이 됐고 젊은이는 물론 나이든 멋쟁이 오너가 몰아도 멋진 그림을 만들어냈습니다.
1세대 프라이드는 당시 모습 그대로 지금 현재 '이란'에서 생산중입니다. 그만큼 간결한 설계와 내구성 등이 참 좋은 차였습니다.
당시 기아산업은 후발주자답게 현대차 그리고 대우차와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똑같은 시장에 똑같은 콘셉트를 앞세워 경쟁하기보다 그들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뚜렷했지요.
결국 선택은 맞아떨어졌고 기아산업은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가며 대우차를 추월해 버립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현대차를 추격했습니다. 우리 자동차 역사에서 기아산업이 마침내 존재의 당위성을 찾아가던 무렵이었습니다.
1세대 프라이드는 당시 현대차 엑셀과 프레스토, 대우차 르망과 경쟁했습니다. 배기량과 가격 등을 따졌을 때 서로 경쟁모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에게 '차종 다양화'는 먼나라 이야기였습니다. 그저 자동차는 소형과 준중형, 중형이 대세였고 가뭄에 콩나듯 대형차를 만나던 때였으니까요.
프라이드는 경제성을 앞세웠습니다. 뒤이어 등장한 콩코드는 다른 중형차와 달리 품격과 함께 고성능을 지향했습니다. 멋쟁이 오너 드라이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인데요. 그 무렵 콩코드는 차를 알고 운전을 즐기는 매니아에게 어울리는 차였습니다.
기아차는 당초 소형차 시장에 진출하면서 일본 마쓰다와 손잡았습니다. 그 무렵 미국 빅3 가운데 하나인 포드는 넘치는 현금성 자산을 앞세워 글로벌 M&A에 나섰고, 일본 마쓰다 지분까지 보유하며 영역을 넓히고 있었지요. 물론 호시탐탐 기아차도 노렸습니다. 하청 조립공장으로 적잖은 메리트가 있었거든요.
당시 포드는 점차 시장이 커지고 있는 미국의 소형차 시장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덩치 큰 세단만 만들어봤지 소형차 개발경력이 전무했다는 건데요. 결국 포드는 소형차 개발기술이 경지에 다다른 일본 마쓰다에게 개발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 차를 가져와 "포드 엠블럼을 붙이면 되겠다"싶었던 것이지요.
어차피 10만대 안팎의 시장을 위해 개발비를 투입하기도, 공장을 따로 건설하기도 버거운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마쓰다는 3도어 소형차를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산이 문제였습니다. 마쓰다 역시 수출형 공장을 따로 건설할 여력이 없는데다 일본에서 생산하면 값비싼 인건비가 걸림돌이었지요. 도저히 수지를 맞추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포드는 눈을 돌려 한국의 기아산업을 찾았습니다. 개발은 일본 마쓰다, 생산은 한국 기아산업, 판매는 미국 포드가 맡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서 프라이드가 미국 포드로 OEM(주문자 상표부착) 수출됐고 현지에서 '포드 페스티바'로 판매하게 됐습니다.
“어라? 이놈들 봐라, 제법이네”
미국 포드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름도 생경한 한국의 기아산업. 이 사람들이 조립하고 생산한 프라이드는 예상외로 품질이 기가 막혔습니다. 미국보다 한결 꼼꼼하고 일본의 조립기술에도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지요.
포드가 페스티바라고 이름 붙인 프라이드는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결과는 성공. 마쓰다와 기아산업 그리고 포드 역시 서로 득을 봤다며 웃었습니다.
미국은 볼트하나 조립하지 않고 1대당 판매 마진을 고스란히 챙겼습니다. 마쓰다는 어차피 121의 후속 모델을 개발해야할 처지였는데 미국서 개발비를 지원해주니 좋았지요.
기아산업은 개발비가 안들어 좋았고, 만들어놓으니 미국에다 차를 판매할 루트까지 고스란히 생겨서 좋았습니다.
미국 포드는 이때부터 기아산업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양질의 값싼 소형차 생산기지로 기아산업은 최적의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페스티바(프라이드)'로 재미를 붙인 포드는 재빨리 프로젝트 2탄을 계획했습니다. 이번에는 소형 SUV였습니다.
프라이드가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포드는 곧바로 기아차를 찾았습니다. SUV 공동개발과 생산을 제안한 것이지요. 새 SUV 개발 프로젝트 이름은 UW-52였습니다.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던 SUV는 대부분이 풀사이즈 픽업을 바탕으로한 대형 SUV였습니다. 크기는 집채(?)만했고 네모 반듯한 디자인이 대부분이었지요. 그 뿐인가요. 엔진도 대배기량 V8 엔진을 겁없이 장착하던 때였습니다. 기름값 걱정없는 미국에선 넉넉한 배기량을 미덕으로 여기곤 했답니다.
그런 와중에 포드가 기아산업에 제안한 콘셉트는 정말이지 획기적이었습니다.
포드의 제안은 이랬습니다. △차 길이는 4미터 안팎 △소형 사륜구동 △차 높이는 170cm 안팍 △2000cc 미만의 작은 엔진 △승하차가 편리한 5도어 방식 등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도심에서 즐길 수 있도록, 그리고 여성 오너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둔탁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디자인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아산업의 규모는 지금의 쌍용차(약 16만대)와 비슷했습니다. 공장이라고 해봐야 광명 소하리 공장이 전부였고 생산 규모 역시 20만대가 안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 마당에 포드는 소형 SUV 15만대 생산을 계획했고 그 가운데 10만대를 기아산업에서 구입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지금 들어봐도 솔깃한 제안입니다.
기아산업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라이드와 콩코드, 캐피탈, 베스타, 봉고 등 생산 차종을 전부 팔아봐야 20만대가 안됐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포드의 제안은 엄청난 성장동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비만 갖춘다면 차종 하나로 회사 판매량이 50% 급성장할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종협상에 이르러 포드는 미국자본의 냉철함을 드러냅니다. 일본 마쓰다의 지분을 야금야금 삼키듯, 기아산업 주식 50%를 요구했던 것이지요.
"아니, 이것들이 감히…"
당시 김선홍 기아산업 회장이 보기에 포드의 조건은 정말 말도 안되는 제안이었습니다. 차종 하나 건네주고 회사를 거져 먹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앞서 일본 마쓰다 역시 위기에 몰린 상황에 포드에 지분을 넘긴 상황이니까요.
자존심이 상했던 기아산업은 냉큼 협상결렬을 선언하고 포드와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기아산업의 강수에 포드도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한 걸음 물러난 제안을 내놓습니다. 기아산업이 당시 계획했던 아산공장(지금의 화성공장)을 별도 법인으로 만들고 그 지분의 50%를 요구하는 수준으로 양보를 합니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결렬됐습니다.
당시 기아맨들의 곤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두들겨 맞더라도 결코 무릎은 꿇지 않겠다”는게 기아맨들의 의지였습니다. 정부에서 "상용차만 생산하라"며 규제를 내세운 탓에 눈물을 흘리면서 브리샤를 단종했습니다.
그렇게 무너져가는 회사를 '봉고신화'로 살려놨더니 엉뚱하게 미국 포드가 회사를 먹겠다고 제안한 것이지요. 그렇게 포드와 SUV 개발계획은 무산됐습니다.
미국 포드가 되돌아가고나서 김선홍 회장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미국 포드가 제안한 소형 SUV 콘셉트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으니까요. 곧바로 상품기획팀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지시했습니다. “이거…, 우리가 해봅시다”
엔지니어 출신 김 회장의 직감은 적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세계에서 이같은 소형 SUV가 큰 인기를 얹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이었습니다. 미국 포드는 이보다 10여년 앞서 이러한 콘셉트를 준비했던 셈이지요.
당시 포드는 요즘처럼 허접한 상품성과 품질, 삼류마케팅으로 비난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30년 전 포드는 세상을 깜작 놀라게할 만한 뛰어난 상품기획력을 지닌 대단한 자동차 회사였답니다.
기아산업은 디자인팀을 소집하고 소형 SUV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엔진은 베스타의 2.2 로나 엔진을 이용하고 수출을 감안해 스퀘어 타입의 2.0 콩코드 가솔린 엔진을 썼습니다.
문제는 승용차 같이 말랑말랑한 모노코크 보디를 써야했지만 기아차에게 그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록스타 뼈대를 변형해 차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나온 차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1세대 스포티지입니다.
1세대 스포티지의 장점은 차체 조종성능과 핸들링이었습니다. 차는 낮은데 뼈대는 두툼한 프레임을 썼습니다. 그러다보니 무게중심이 저 밑으로 내려앉았지요. 키 큰(?) SUV지만 좀처럼 휘청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고무줄 튕기듯 짜릿한 핸들링까지 얻어낸 것이지요. 기술력이 없어 프레임을 쓴 것인데 엉뚱하게도 핸들링이 기가 막히게 나왔던 것이지요.
요즘이야 어깨뼈까지 짜릿한 손맛을 자랑하는 핸들링 SUV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 스포티지의 조종성능은 세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결과물을 만들어 놓으니 기아산업 스스로도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냉큼 1991년 도쿄모터쇼에 스포티지를 공개해 버립니다.
모터쇼에 참가한 전세계 메이커는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까지 전혀 없었던 새로운 차가 등장했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SUV 하나 제대로 만들어본 적 없은, 이름도 생소한 한국의 기아산업이 내놓은 차였다는 사실이 더 큰 이슈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자동차이무니까?"
일본 토요타와 혼다 역시 화들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기아산업이 이처럼 획기적인 차를 내놓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가장 황당했던 것은 누구였을까요? 네 맞습니다. 바로 포드였습니다. 넌지시 콘셉트만 건넨 마당에 기아산업이 냉큼 소형 SUV 콘셉트를 가져다가 신차를 내놓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당시 포드는 기아산업과의 계약결렬로 인해 일본 마쓰다와 똑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개발 논의 단계에 있던 차종을 기아산업이 냉큼 내놓았던 것이지요. 뒷통수 맞은 포드의 눈도 동그랗게 바뀌었습니다.
1993년 7월 마침내 1세대 스포티지가 나왔지만 미국시장에 진출할만한 엔진도 그리고 여력도 없었습니다. 먼진 기습공격으로 선방을 날렸지만 차를 만들 공장이 없었던 것이었지요.
포드가 깜짝 놀라하는 사이 재주많은 일본 메이커는 발빠르게 스포티지를 따라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차가 토요타 RAV-4(1994년) 그리고 혼다 CR-V(1995년) 1세대입니다. 결국 소형 SUV를 서둘러 개발한 토요타와 혼다가 냉큼 미국 시장을 선점하고 말았습니다.
1세대 스포티지는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둔 차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세계 완성차 메이커에게 기아라는 이름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모델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후 스포티지는 2~3세대를 거쳤고 말랑말랑한 모노코크 보디로 바뀌었습니다. 따져보면 1세대 스포티지와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차종으로 봐야겠지요.
이들은 그 옛날 스포티지보다 한결 편하고 안락하며 좋은 엔진을 갖췄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을 깜짝 놀래킬 ‘와우 포인트’를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의 스포티지가 등장했지만 1세대 스포티지는 일부 매니아들 사이에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획기적인 콘셉트로 전세계를 주목시켰고, 파리-다카르 랠리 완주하며 기아산업의 기술력도 입증했던 유일한 차였으니까요.
세상을 깜짝 놀래킨. 그래서 대한민국 자동차의 '한방'을 멋지게 보여준 최초의 자동차는 바로 스포티지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