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큰헤이드호
각종 해상 사고 때마다 언급되며 불문율로 자리잡은 '버큰에이드호' 일화는 1852년 영국 해군 수송선으로 남아프리카로 가던 도중 케이프타운 66km 전방에서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면서 시작된다.
버큰헤이드호 탑승객 630여명 중 여자와 아이들은 130여명이었다. 순항하던 버큰헤이드호 사고는 모든 승객이 잠든 새벽 2시 일어났다.
당시 버큰에이드호에 구비된 구명보트는 단 60명씩 수용할 수 있는 3정뿐이었다. 당시 승선인원 630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버큰헤이드호의 세튼 함장은 병사들을 갑판 위에 집합시킨 뒤 부동자세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세튼 대령은 "여자와 어린이부터 태워라"라고 명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3척의 보트에 나눠탔다.
세튼 대령의 명령에 군인들은 끝까지 부동자세로 움직이지 않았고, 구명보트가 버큰헤이드호를 떠났다. 세튼 대령을 포함한 436명의 군인은 그대로 배와 함께 수장됐다.
여성과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와 남편이 물 속에 잠기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울부짖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침몰 당시까지 "여자와 아이 먼저"를 외쳤던 세튼 대령의 일화는 대형 선박 사고때마다 불문율로 거론되며 회자되고 있다.
반면 지난 16일 오전 9시께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인근에서 침몰된 세월호 선장 이준석(69)씨는 여객선이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혼자서 가장 먼저 탈출했다.
세월호 침몰 나흘째 실종자 273명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선장과 3등항해사 박씨, 조타수 등 세월호의 선박직 직원들 15명이 모두 생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선장 이씨는 부적절한 선내방송 때문에 희생이 컸다는 지적에 대해 "당초에는 퇴선 명령을 했으나 조류가 빠르고 구조선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객들이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해 퇴선명령이 늦어졌다"는 책임회피성 발언을 일삼아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의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만 믿고 객실에서 대기하던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은 탈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고 사흘째인 19일 실종자 273명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