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최종현 ‘산유국 대열’ 합류
현대 정주영 ‘국산 자동차’ 시동
LG 구인회 ‘에너지 신사업’ 개척
1950년 6·25 전쟁으로 무너진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재계는 ‘사업보국’(사업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함)을 기업가 정신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던 재계 1세대들의 노력을 먼저 꼽는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명예회장, 고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의 일대기는 ‘승부사’, ‘불도저’라는 수사(修辭)와 함께 회자되는 이야기다.
1938년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한 호암 이병철 창업회장은 1960년대 후반 세계 전자산업의 동향을 주시하고 사업성을 검토한 결과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 수출 등 우리나라 경제 단계에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호암은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세워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같은 해 12월 삼성-산요전기, 이듬해에는 삼성NEC(옛 삼성전관)를 설립해 한국의 브라운관 시대를 열었다.
호암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 사업에 나설 결심을 굳힌 것은 1978년이다. 호암의 나이 73세. 그는 수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관련 자료를 읽었다.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애를 썼다. 5년째 되던 해인 1982년 10월 반도체·컴퓨터사업팀을 조직하고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3년 3월 15일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삼성 관계자는 “호암은 반도체의 성공 여부에 삼성과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보고 계속 전진해왔다”며 “당시의 결단은 삼성전자가 현재 명실상부한 세계 반도체 1등 기업의 위엄을 달성하는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SK그룹은 최종건 창업주가 1973년 47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후 동생인 최종현 선대회장이 다진 초석 위에 세워졌다.
최 선대회장은 1980년대 개념조차 생소했던 ‘세계화’에 눈을 떴다. 시장의 힘이 한 국가의 경제를 넘어 주변 지역과 세계를 통합할 것이라며 글로벌 시장 진출과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1970년대 최 선대회장은 장기적 안목으로 중동지역 왕실 등과 석유 네트워크를 구축해갔다. 그의 진정성에 마음을 연 중동 인사들은 2차 오일 쇼크 때 우리나라가 에너지 위기를 벗어나게 도와준 우군이 됐다. SK는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산유국 대열에 올랐다.
최 선대회장은 1993년 전국경제인 회장에 취임하며 경제5단체 공동으로 국가경쟁력 민간위원회를 발족해 ‘미스터(Mr).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IMF의 긴급 자금지원을 받기 직전인 1997년 가을, 폐암 투병 중이던 최 선대회장은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청와대를 찾아갔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해 “한국 경제는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고언했다. 임종 직전까지 일등국가로서의 비전을 놓지 않았던 최 선대회장의 충언이었다.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은 한국 재건을 위한 불굴의 의지를 바탕으로 수많은 기적을 이뤄냈다. 중동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국가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자양분으로 썼다. 그는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인부들을 독려했고 터널 굴착 시 수맥을 잘못 건드려 사고가 나자 직접 착암기를 뺏어 들고 앞장서기도 했다.
아산은 아무것도 없던 백사장에서 조선 산업을, 허허벌판에서 자동차 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아산은 1967년 12월 포드와 합작해 현대차를 설립했으나 6년 후 결별하고 1976년 1월 순수 국산 자동차 1호인 포니를 만들어냈다. 현대차가 세계 자동차 업체 중 16번째로 독자 모델을 개발하는 순간이었다.
아산은 생전 실천적 행동을 강조했다. 그가 남긴 “이봐! 해보기는 해봤어?”라는 지청구(아랫사람을 꾸짖는 말)는 실패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기보다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산은 위기 때마다 “기업이란 현실이요. 행동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기업이 클 수 없다. 우선 행동해야 한다”며 현장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산은 1998년 소 떼를 몰고 방북해 분단 이래 최초로 휴전선을 개방,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인물이다.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은 전자·화학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개척자이다. 연암의 ‘개척정신’은 1947년 부산의 작은 화장품 공장을 오늘날 LG그룹으로 성장시킨 모토가 됐다.
연암은 1947년 1월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럭키표’ 크림을 생산했다. 파손되지 않는 크림 뚜껑 제조를 고민하다 플라스틱 사업을 시작한 1957년 군소 업체의 도전으로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자 전자 부문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1958년 LG전자의 모태인 금성사의 출발점이었다.
연암은 1950년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공장을 세우기 전에 연구실부터 설립해 연구설비를 들여왔다.
연구개발에 대한 집념은 국내 최초의 플라스틱 제품과 치약, 합성세제 등 화학을 기반으로 한 생활용품, 라디오, 세탁기, TV, VTR 등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 됐다.
연암은 1966년 국내 민간업체 최초의 외자를 도입한 합작회사 호남정유를 설립해 에너지산업을 개척하며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에 초석을 놓기도 했다.
“일단 착수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성공하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 한층 더 큰 것, 보다 어려운 것에 새롭게 도전하라.” 개척자다운 면모를 잘 보여주는 연암의 어록 중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