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사는 박준수, 유영미 씨는 동갑내기 부부다. 11년 전 친구 소개로 만나 반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당시 준수 씨는 완성차를 만드는 대기업에, 영미 씨는 전자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에 다녔다. 결혼 1년여 만에 아이를 낳았고, 영미 씨는 회사를 나왔다. 외벌이에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살만했다. 아이에게 드는 돈도 별로 없었고, 전세라 대출 부담도 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 욕심이란 걸 알면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대출을 최대한 끌어모아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부부는 돈을 벌어야 했다. 이자도 문제였지만 아이 교육비도 점점 늘어가서다. 영미 씨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작은 식당을 열었다.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늘었다. 다행히 아이는 친정 어머니가 맡아주셨다. 함께 놀아주지 못해 늘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준수 씨가 직장을 그만뒀다. 사실상 정리해고를 당했다. ‘가게라도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여기던 부부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것이다. 손님은 끊겼고, 부부간의 대화도 사라졌다. 딸과 함께 따뜻한 저녁 밥을 먹어본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준수 씨와 영미 씨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희수는 특별한 아이다. 임신 9개월 차에 당 수치가 치솟았다. 임신성 당뇨였다. 의사 말로는 산모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다. 아이만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태어나, 예쁘게 자라고 있다.
그래서 아이에게 더 미안하다. 엄마 손이 필요한 나이에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이라도 일정하면 저녁이라도 챙겨줄 텐데, 가게를 운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주말엔 더 바빴다. 얼마 전 아이 어릴 때 사진을 보는데 ‘엄마’가 없었다. 전부 아빠나 할머니뿐이었다. 속상했다.
몇 해 전 구직활동을 한 적이 있다. 장사도 안되고 아이와 놀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법학 관련 전공을 살려서 일을 찾아봤는데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다고 하니 면접관 인상이 변했다. 바로 구직활동을 접었다.
그래도 요즘은 손님이 늘어서 다행이다. 얼마 전 남편이 호프집을 열었는데 장사가 제법 잘 된다. 물론 아직 통장은 마이너스지만 말이다. 사람을 구하지 못해 우리 부부는 낮엔 식당, 저녁엔 호프집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몸은 힘들지만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
요즘 가장 걱정되는 건 엄마다. 아이가 하교하면 엄마가 친정집으로 데리고 간다. 학원 다 보내고,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부부가 새벽에 자는 아이를 업고 오신다. 연세가 있다 보니 많이 힘들어하신다. 칠십이 훌쩍 넘은 엄마는 주말도 없이 홀로 육아를 하신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겠다. 죄송하단 말만 입에 달고 산다.
얼마 전 아이를 가졌는데 잃었다. 내 몸이 많이 약해져 있단다. 둘째 생각이 간절한데 내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두렵다. 문뜩 ‘뭘 위해 살고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네 욕심”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서러웠다. 누구나 기준은 다른 건데 말이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 일단은 ‘가게 사람이 구해지면 좀 괜찮아지겠지’라며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다.
결혼 전엔 낚시, 드라이빙 등 동호회를 여럿 맡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친구들도 많았다. 아내도 동호회에서 만났다.
우리도 여느 부부처럼 처음엔 애틋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라 더 그랬다. 하지만 첫 애를 낳은 후부터 아내는 예민해졌다. 내가 하는 육아가 성에 안 차는지 매번 신경질을 냈다. 늦은 귀가는 부부 싸움의 단초가 됐다.
그러던 중 아내가 식당을 열었다. 아픈 몸으로 육아와 집안일을 완벽하게 꾸려내던 아내는 일에 매달렸다. 아이를 키우는 건 내 몫이 됐다. 장모님께서 도와주셨지만, 버거웠다. 모임과 회식은 사치였다. 육퇴(육아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소소한 행복이었다.
십수 년을 다니던 직장에서 나왔을 때 꽤 힘들었다. 상실감을 떨치고 나니 책임감이 밀려왔다. 육아부터 집안, 가게까지 뭐하나 제대로 자리 잡은 게 없었다. 심지어 그 시기 아내는 손님 갑질에 충격을 받고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그 여파로 아이까지 잃었다. 그런 엄마를 보는 아이도 불안해했다.
내가 더 따뜻하게 보듬어줘야 했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수입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두 테이블이 전부였던 날도 있었다. 퇴직금마저 바닥나자 결국 양가에 손을 벌렸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2년을 버텼다.
결단이 필요했다. 지인과 함께 호프집을 열었다. 장사가 제법 잘 된다. 물론 여전히 ‘나’는 없다. 친구들과 하는 술 한 잔이 그립지만 아직은 남편과 아빠로 살아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결혼 11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이 보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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