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신증후군출혈열(유행성출혈열 또는 한국형출혈열) 병원체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해 원인 모를 질환으로부터 인류의 생명을 구했던 고(故)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 치사율 높던 출혈열 진단법을 제시하고 예방백신 개발로 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세계적인 의학연구자다. 지난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던 고인은 지난달 5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그의 업적을 돌아보고 그가 후학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제자이자 국제한타바이러스학회장을 맡고 있는 송진원 고려대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 교수를 만났다.
신증후군출혈열 연구는 6.25전쟁 시기부터 본격화됐다. 송 교수에 따르면 당시 3000명 넘는 감염자가 나오고, 치사율이 20% 이상임에도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이 명예교수는 1970년부터 미 육군에서 연구비를 받아 본격 연구에 나서, 1976년 한탄강 인근에서 채집한 등줄쥐 폐에서 병원체 분리에 성공했다. 한탄바이러스라고 이름 붙은 이유다. 이어 1979년 서울 한 아파트에서 잡은 쥐에서 성질이 다른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서울바이러스’다. 이후 그는 미국국립보건(NIH) 연구비 지원으로 한탄바이러스 연구를 이어갔고, 1988년 예방백신 개발에 성공해 1990년 녹십자에서 ‘한타박스’로 출시됐다.
송 교수는 “한 연구자가 병원체 발견, 진단법과 예방백신을 개발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전 세계 연구자들이 이 명예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해 유사 바이러스만 30여 개 넘게 발견됐다. 핀란드 푸말라바이러스, 미국 신놈브레바이러스와 뉴욕바이러스 등이 대표적이다. 송 교수는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출혈열 바이러스가 이호왕 박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며 “이 박사님은 국내 바이러스 학계 후배 연구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든든한 힘이다. 지금도 해외 연구자들은 이호왕 박사는 물론 한국 연구자들을 높이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고인이 노벨생리의학상 후보로 거론된 이유는 학술데이터 분석기업 클래리베이트가 지난해 ‘피인용 우수 연구자’ 16명에 고인의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클래리베이트는 매년 전 세계에서 논문이 가장 많이 인용된 0.01%의 연구자를 선정하고, 이는 노벨상 수상 예측 지표로 꼽힌다. 송 교수는 “내심 기대했는데 아쉽다”면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로 선정됐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세계가 인정한 연구성과를 냈던 1970~80년대 국내 연구환경은 장비와 시설이 부족했다. 송 교수는 “어려운 환경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도 상상이 안될 정도의 큰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후배 연구자들이 배워야할 자세로 송 교수는 ‘기록’과 ‘노력’을 꼽았다. 송 교수는 “고인은 기록을 굉장히 중요시하셨고, 꼼꼼하게 남기셨다. 과학자들은 꼼꼼히 세세하게 기록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고 회상했다. 또한 “과학자들에게 우연은 열심히 노력할 때 오는 기회다. 항상 도전정신을 가져라. 세계적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를 정해 평생 도전하라”는 것이 고인이 항상 강조했던 '유지'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