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국제사회가 러시아와의 ‘손절’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에너지 영향력을 배경으로 서방 주도 국제질서에 도전, 러시아 제국을 부활시키려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꿈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러시아는 글로벌 에너지 지형의 중심에 있었다. 옛 소련 붕괴 이후 경제 규모가 쪼그라든 러시아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에너지였다.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으로 글로벌 수요의 8%를 공급했다. 유럽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천연가스 45%, 석탄 45%, 석유 25%를 유럽에 공급했다.
역으로 따지면 유럽은 러시아의 ‘돈줄’이었다. 러시아 정부 예산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를 팔아 벌어들인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달했다. 지난해 러시아의 총 수출 품목 가운데 절반가량이 석유와 천연가스였다. 그야말로 에너지는 러시아를 떠받친 힘이자 원천이었다.
러시아도 이 부분을 노렸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이 강경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생각은 달랐다. 유럽은 그동안 러시아에 대한 높은 에너지 의존도를 관리가 가능한 리스크로 여겨왔다. 러시아가 에너지 공급자로서 칼자루를 쥐고 있지만 이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만큼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은 러시아가 언제든 에너지로 도박을 벌일 수 있는 ‘비이성적’ 국가라는 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응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유럽은 올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3분의 2가량 줄이기로 했다. 2027년까지 러시아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유럽 지도자들은 러시아 원유 금수조처 논의에 착수했고 영국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중단했다. 독일은 러시아와 연결된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운영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대신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위한 기반시설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현재 새 LNG 시설은 네덜란드에 건설 중이다.
에너지 기업들도 러시아를 등지고 있다. 글로벌 주요 에너지 기업인 쉘, 엑손모빌 등은 수십년간 진행한 러시아 투자에서 손을 뗀다고 밝혔다.
유럽이 대체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단기간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무 자르듯 정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니코스 사포스 에너지·지정학 팀장은 “러시아와 유럽의 에너지 무역이 결국 제로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도 출구를 모색할 것이다. 이미 러시아 석유 수출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의 문을 두드릴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8100km 가스관 덕에 천연가스 판매가 증가할 여력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동진(東進)은 지정학적으로 한계를 내포한다. 러시아에는 동부보다 서부 시베리아에 더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이 묻혀 있다. 서방보다 아시아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어려운 구조다. 중국이 인프라를 재배치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의지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세계 에너지 지형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흔들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겠지만 역할 축소가 불가피하다. 러시아가 에너지 초강대국이던 시절이 가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도 이 같은 전망에 무게를 실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와 세계 경제의 디커플링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른 국가와 기업들이 대러 의존도를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제조와 생산 본거지를 재평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에너지 안보가 에너지 전환 시대에 최고 우선순위로 떠올랐다”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지난 30년간 글로벌 경제를 주름잡았던 세계화에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