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탱크도 만든다'는 ‘제조업 명가’ 문래동…절반은 식당ㆍ카페에 밀려

입력 2022-02-23 18:03 수정 2022-02-2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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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산업 근간이었던 문래동 흔들
“이제 모르겠다…대선 후보 기대 안해”
높아지는 임대료와 제조업 불황에 한숨

▲23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 머시닝밸리 골목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날 기자 찾은 골목에는 업체 2, 3곳 중 한 곳 꼴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23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 머시닝밸리 골목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날 기자 찾은 골목에는 업체 2, 3곳 중 한 곳 꼴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뿌리산업 집적지라고 하면 서울에 문래동 한 곳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도 절반은 식당과 카페가 들어선 것 같아요. 계속 없어지겠죠.”

문래동에서 기어를 제작하는 주대왕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때 내로라하는 제조업 기술자들로 가득찼던 문래 머시닝밸리는 높아지는 임대료와 제조업 둔화로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23일 오전 기자가 찾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머시닝밸리에서는 드문드문 기계 소리가 들렸다. 머시닝밸리 골목에 위치한 업체 2, 3곳 중 한 군데 꼴로 문을 열고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머시닝밸리 골목에서 오랫동안 약국을 운영한 사장은 “문래동 골목의 기계소리가 이전보다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머시닝밸리 골목을 품고 있는 문래기계금속지구는 소규모 제조업체 약 1300여 곳이 모여 있는 단지다. 30년간 스테인리스 판매를 해온 이흥순 신양스텐레스상공사 사장은 “문래동 골목을 한 번 지나가면 탱크를 만든다는 말이 있었다”며 “그 정도로 기술자가 많았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 않다”며 “매출도 많이 줄고, 기술자들도 많이들 떠났다”고 말했다.

불경기, 높아지는 소재값, 인건비 상승의 3중고

▲23일 특수 부품을 만드는 삼경정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나사들이 일렬로 정리돼 있었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23일 특수 부품을 만드는 삼경정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나사들이 일렬로 정리돼 있었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문래동에서만 25년간 알루미늄을 판매한 황순필 영등포금속 사장은 문래동 영세 제조업체들이 “3중고를 겪고 있다”고 표현했다. 황 사장은 “대기업에서 일이 많아야 우리도 일이 많은데 경기도 어렵고, 코로나 이후로 금속 소재는 값이 다 올라서 알루미늄은 2배로 뛰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건비도 상승했다”며 “소상공인들은 방도가 없다”고 토로했다.

카페나 음식점이 들어서며 오르는 임대료도 부담이다. 머시닝밸리 골목에서 기어를 제조하는 주대왕 사장은 “제조업에서 월세 100만 원을 받는다면 서비스업 세 주면 200만 원 받을 수 있다”며 “건물 주인들은 서비스업에 세 주고 싶지 않겠냐”고 허탈한 듯 말했다. 같은 골목에서 철로 특수 부품을 만드는 오신근 삼경정밀 사장은 “임대료가 계속 올라서 여기 사람들이 다 피가 마른다”고 말했다. 불경기에다 소재값이 오르고, 인건비와 임대료까지 오르니 업체들이 버티질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 월세로 60만 원을 받았던 50㎡(약 15평) 가게가 이제는 월 150만 원 수준이다.

하나 둘 떠나며...집적지로서의 특수성 사라져

▲23일 문래 머시닝밸리에 위치한 한 제조업체에 스테인리스 절단 판매를 위한 장비가 놓여 있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23일 문래 머시닝밸리에 위치한 한 제조업체에 스테인리스 절단 판매를 위한 장비가 놓여 있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과거 문래동은 영세 제조업체가 한 데 모여 제조업 생태계를 이뤘다. 주 사장은 “저도 혼자서 일 못해요”라며 “문래동 내에서 물건 맡기고 외주업체랑 연계해서 완제품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소재가 들어오고, 모양대로 만들어서 광 내는 모든 작업이 한 데서 이뤄져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데 가게들이 서로 떨어지게 되면 시간과 비용 부담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업체가 한 데 모여있다는 장점 덕분에 주문을 하러 오던 사람들도 발길을 끊었다. 황 사장은 “나이 든 기술자들은 사라지고, 젊은 인력은 유입되지 않으니 그 분들도 오질 않는다”고 말했다. 주 사장은 “그나마 이곳에 공장이 있으니 작업을 이어가던 기술자들도 임대료 때문에 일을 접는다”며 “이미 절반이 서비스업이 들어섰고 계속 제조업체는 사라질 것”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단지 조성하고, 젊은 인력 늘려야”

▲23일 문래 머시닝밸리 골목에 위치한 한 가게 앞에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23일 문래 머시닝밸리 골목에 위치한 한 가게 앞에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정영인 수습기자 oin@)

제조업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문래동 기술 장인들은 한 목소리로 뿌리 산업 활성화와 젊은 기술자 양성을 강조했다. 이 사장은 “카페, 음식점 창업도 좋지만,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제조업 기술자를 육성하는 지원도 늘려야 한다”며 “이런 혜택과 지원을 늘려야 이런 데 일을 하러 오는 인력이 유입되고 기술력도 유지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작은 제조업체들이 모여서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공업 단지를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오 사장은 “언제 나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 주변에 새로 들어선 음식점도 이용하지 못했다”며 “한 명씩 피가 마르게 하기보다 차라리 단지가 조성돼 거기에 모여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래동 장인들이 생각하는 제조업이 미래는 밝지 않았다. 이들은 곧 들어설 새로운 정부에도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뽑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며 “IT, 4차 산업혁명뿐만 아니라 이런 제조업체를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관련 공약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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