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값 계속 오르면 낭패
폐단 없애려면 물량 확보 관건
정부, 공공전세 11만채 공급
완충 역할 '임대사업자' 폐지
서울 동작구 상도동 '상도 파크자이' 아파트(전용면적 84㎡)에 사는 A씨는 올 5월 전세계약 갱신 청구권을 사용했다. 재계약에선 전셋값을 최고 5%까지밖에 올리지 못 하게 한 전·월세 상한제에 따라 5억9000만 원이던 전세금을 6억1950만 원으로 올려줬다. 8억 원~9억 원을 호가하던 이 아파트 같은 면적 전세 시세보다 3억 원 가까이 싼 값이었다. A씨가 재계약을 맺은 지 한 달 후 상도 파크자이 전용 84㎡형은 10억 원에 전세 신고가를 경신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 자이'에서도 유사한 전세 '이중가격' 현상이 나타났다. 8억5000만 원에 이 아파트 전용 84㎡형에 전세 살던 B씨는 5월 5%를 증액한 8억9250만 원에 전세계약을 갱신했다. 같은 달 이 아파트에서 13억5000만 원에 신규 전세 계약이 체결된 것과 비교하면 4억 원 넘게 저렴하다. 지난달 계약된 전세 신고가(14억3500만 원)와는 5억 원 이상 차이 난다.
주택 임대차보호법 개정 이후 전세시장 이중화 현상이 고착화하고 있다. 같은 단지, 같은 면적 아파트라도 새로 전셋집을 구했는지, 기존 전세계약을 갱신했는지에 따라 전세보증금이 적게는 수억 원씩 차이 난다. 전세난이 해소되지 않으면 기존 세입자도 2년 후엔 전세 난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7월 말부터 계약갱신청구권제와 전·월세상한제가 시행되면서 기존 세입자는 전셋값 증액 걱정 없이 2년 더 거주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문제는 계약 갱신이 현명한 선택이 될지는 향후 전세 흐름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전셋값이 안정된다면 기존 계약을 갱신하는 게 더 이익이지만 전셋값이 지금처럼 지속해서 오르다간 계약 갱신을 선택한 이들이 낭패를 볼 수 있다. 계약 갱신 기간이 끝나면 기존 세입자도 높아진 시세에 맞춰 새로 집을 구해야 해서다.
상도 파크자이를 예를 들면 6억1950만 원으론 새로 전셋집을 구할 수 없다. 이 아파트에서 가장 작은 전용 59㎡형 전셋값도 신규 계약 기준 7억 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재로선 높아진 전셋값이 새로운 표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계약 갱신을 선택하더라도 2년 후엔 높은 전셋값을 감당해야 한다"며 "이런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충분한 전세 물량 확보가 필요한데 단기간에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나마 전세난을 경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게 '공공임대주택'과 '등록임대주택'(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한 민간임대주택)이다.
공공임대주택은 공기업에서 임대료를 책정하기 때문에 민간 시세와 무관하게 저렴한 시세로 전셋집을 공급할 수 있다. 민간주택과 공공임대주택이 섞여 있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초 더샵 포레'의 경우 공공전세주택과 민간전세주택 간 시세가 7억 원 가까이 차이 난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운영하는 이 아파트 전용 84㎡형 장기전세주택 임대료는 3억 원대지만 민간 시세는 10억 원에 이른다.
정부도 이 같은 효과를 의식해 지난해 내년까지 공공전세주택 11만채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주택 크기도 기존 전용 85㎡으로까지 키우기로 했다. 문제는 속도다. 당장 올해 입주할 수 있는 공공전세주택은 2000가구 정도라는 게 국토부 추산이다. 중형 공공전세주택은 내년에서 첫 삽을 뜬다.
이 빈틈을 메울 수 있는 게 등록임대주택이다. 정부는 등록임대주택에 세제 혜택을 주는 대신 10년 의무 임대 기간 준수, 임대료 증액 제한(2년에 5%) 등 공적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사실상 전·월세 상한제가 10년 단위로 적용되는 셈이다.
대한주택임대인협회에 따르면 등록임대주택 전·월세 시세는 일반 민간 전·월세보다 39% 저렴하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 '흑석 한강 푸르지오' 전용 84㎡에선 등록임대주택(5억9850만 원)과 민간 전세 시세(11억 원)가 5억 원 넘게 차이 난다.
하지만 등록임대주택 제도는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정부는 등록임대주택이 투기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겠다며 아파트 등록임대주택 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 민간 임대시장에서 완충 역할을 해주던 제도가 사라지는 셈이다.
성창엽 대한주택임대인협회 회장은 "정부 정책 때문에 지금까지 등록임대주택 53만 가구가 사라졌다"며 "집값을 잡겠다며 임대주택을 줄이니 전세 물건도 줄어들고 시세보다 저렴하게 전세를 구할 수 있는 집도 사라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