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TSMC에 치인 인텔의 굴욕…행동주의 투자자 “반도체 생산 포기 검토해야”

대니얼 롭 서드포인트 CEO, 전략적 대안 모색 촉구
“올해만 시총 600억 달러 증발...경영진은 거액 보수 책정” 비판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위치한 인텔 사옥. 행동주의 투자자 대니얼 롭은 29일(현지시간) 인텔에 사업 일부를 매각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텔아비브/로이터연합

한때 반도체 산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미국 인텔이 굴욕적인 처지에 놓였다. 삼성전자와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생산 업체(파운드리) 대만 TSMC와의 경쟁에서 밀린 끝에 반도체 생산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는 투자자들의 압박을 받고 있다.

29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행동주의 투자자인 대니얼 롭 서드포인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오마르 이시라크 인텔 회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업 일부 매각이나 반도체 제조와 설계 사업 분할 등 전략적 대안을 모색하라고 촉구했다.

서신은 “인텔의 현재 문제가 미국 기술산업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며 “인수했던 사업 일부를 매각하거나 설계 및 제조 사업을 분할하는 등의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텔의 시가총액은 올해에만 600억 달러(약 65조 원) 가까이 감소했으며 지난 5년간 사업 측면에서 동종업계보다 크게 밀리고 있다”며 “그런데도 이사회는 어떻게 경영진이 자신들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보수를 책정하도록 허락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러한 ‘책임 포기’로 보이는 이들의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엄포를 놨다.

인텔 측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모든 투자자의 의견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텔이 칩 제조 기술 경쟁에서 이미 삼성전자와 대만 TSMC에 뒤처졌다고 평가했다. TSMC는 최근 엔비디아와 AMD 등 인텔 경쟁사들과 계약을 맺고 칩을 제조하면서 인텔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글로벌 메모리칩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밥 스완 인텔 CEO는 7월 실적 발표 당시 “최첨단 칩 제조 일부를 아웃소싱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 사실상 경쟁에서 밀려났음을 인정했다.

또 경기 불황 속에 인수·합병(M&A) 작업이 빨라지면서 인텔을 위협하는 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7월 아날로그디바이시스는 맥심인티그레이티드프로덕츠를 200억 달러(약 22조 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했고, 9월 엔비디아는 영국 반도체 설계 업체인 ARM홀딩스를 400억 달러에 인수했다. 반면 인텔은 SK하이닉스에 낸드플래시 메모리 부문을 양도하기로 하는 등 후퇴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기존 고객사들의 자체 칩 개발 선언 역시 인텔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난달 주요 고객사 중 하나인 애플이 자체 개발 칩 ‘M1’이 탑재된 신제품을 선보이면서 인텔 의존 낮추기에 돌입했고, 이달 아마존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알고리즘의 학습 속도를 높이는 새로운 칩을 공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도 자체 칩을 개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명 행동주의 투자자인 롭이 나섰다는 소식에 인텔 주가가 이날 4.9% 급등하는 등 시장도 변화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서드포인트는 최근 인텔 지분을 약 10억 달러에 매수했으며, 인텔 측이 이번 제안을 거절할 경우 내년 이사회에서 새로운 이사 후보를 추천할 방침이다.

번스타인리서치의 스테이시 라스곤 애널리스트는 “인텔은 이미 서드포인트가 제안한 구조조정을 고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아직 칩 제조 사업부를 설계와 분리하는 것에 대해 투자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불확실하다”며 “분할이 현재 인텔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