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제재를 무기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을 고사 직전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미국이 반도체의 자급자족을 추진한다. 대중국 제재의 불똥이 되레 자국 기업들에까지 옮겨 붙게 되자 반도체의 해외 의존을 아예 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의 양대 축인 중국에 이어 미국까지 반도체의 자급자족을 실현하면 전체 체인에 큰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6일(현지시간)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연방의회는 미국 반도체 산업의 리쇼어링(본국 회귀)을 촉진하기 위해 약 250억 달러(약 29조3750억 원) 규모의 보조금 지급을 검토하고 있다. 이미 상원과 하원이 초당적으로 머리를 맞대 반도체 지원 법안 심의에 들어갔으며, 제조업의 리쇼어링을 장려하는 트럼프 행정부도 해당 법안을 지지할 것으로 알려졌다.
26일까지 밝혀진 해당 법안 초안에 따르면 반도체 공장과 연구시설 등에 연방정부가 건당 최대 3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담겼다. 반도체 공장은 건설비만 약 100억 달러가 투입되는 경우도 있어서 거액의 보조금이 투입된다면 경쟁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15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만들어 10년 동안 운용하는 방안도 담겼다. 반도체 업계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은 2021회계연도(2020년 10월~2021년 9월) 예산에 포함시킬 방침이다. 이외에 반도체 산업은 국가안보상 고도의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만큼 국방부 등이 50억 달러의 개발자금을 공급하는 안도 담겼다. 보조금은 연방정부에서만 총 250억 달러 규모에 달하며, 주정부와 지방정부도 세제우대 등으로 측면 지원한다.
미국 정부와 의회가 반도체 산업에 이처럼 대규모 공적 자금을 투입키로 한 배경에는 반도체 생산을 계속 해외에 의존한다면 산업 경쟁력 저하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와 군사력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조사 결과,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판매 시장점유율은 미국이 47%를 차지, 2위인 한국(19%)과 3위 일본(10%)을 크게 웃돌았다.
하지만 생산 능력으로 보면 얘기가 다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조사 결과에서는 미국 반도체 생산 능력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엔비디아와 퀄컴 등 반도체 회로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기업이 많고, 생산은 대부분 해외에 위탁하기 때문이다. 파운드리가 많은 중국은 생산 능력이 15%로 이미 미국을 뛰어넘었다. 10년 뒤에는 24%로 확대해 대만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를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정부가 중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미국 상무부는 이날 자국 기업들에 서한을 보내 중국 최대 반도체 제조업체인 SMIC와 그 자회사에 특정 기술을 수출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SMIC로의 기술 수출이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사 활동에 활용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SMIC는 “미국 정부의 제재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며 “우리는 중국 인민해방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군사적 목적을 위해 반도체를 제조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