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화웨이 제재가 점점 강화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손익계산이 복잡하다. 기업들은 미국과 중국 정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화웨이 사태가 가져올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3일 외신 등에 따르면 세계 2위 반도체 설계회사 ARM과 영국 이동통신사들이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이전에 발표된 구글의 거래중단 선언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업계는 판단하고 있다.
국내 전자·IT 업계는 ARM의 결정이 사실상 화웨이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없다고 보고 있다. ARM은 RISC(중앙처리장치 안의 명령어를 최소로 줄여 단순하게 만든 프로세서) 설계 및 아키텍쳐 IP(지적재산권) 기업으로 반도체 설계도를 제공한다.
퀄컴, 삼성, 애플 등 모바일 AP(스마트폰 중앙처리장치)의 90%, EC(임베디드 컨트롤러·PC이외의 장비에 사용되는 칩)의 90%가 ARM 기반이다. ARM의 특허를 피해 AP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화웨이의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사업 자체가 존폐 위기에 내몰린 셈이다.
이는 국내 스마트폰 기업들에 기회가 될 전망이다. 화웨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애플을 제치고 점유율 2위에 올라서며 삼성전자를 바짝 쫓고 있다. 일각에서는 화웨이 제재가 연말까지 지속될 경우 삼성전자 스마트폰 출하량이 전년 대비 10%인 2000만 대가량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ARM의 거래중단으로 상황이 종료된 것 같다. 화웨이에 부품을 공급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화웨이의 스마트폰 사업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신장비는 당장의 큰 반사이익을 볼 게 없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통신장비 특성상 휴대폰 바꾸듯이 제품 교체가 빨리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보이콧하는 국가가 늘면서 삼성전자 등에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특히, 화웨이가 북미와 일본보다는 중국과 유럽·중동 지역에서 시장점유율이 높이고 있어 일부 지역에서 미국 동맹국에 의한 소폭의 시장점유율 변동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화웨이가 미국 마이크론을 대신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로부터 받는 메모리 반도체를 늘릴 수 있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화웨이는 전 세계에서 연간 약 670억 달러(약 80조 원) 규모의 부품을 조달하고, 이 가운데 약 110억 달러를 미국에서 구입한다.
그러나 화웨이가 받는 반도체가 모두 메모리 반도체는 아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무조건 혜택을 본다고 하긴 어렵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는 화웨이에 서버용, PC용, 모바일용 메모리 반도체 등을 공급하고 있으나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으로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디스플레이와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등 기타 부품 업체들의 입장에서도 셈법이 복잡하다. 미국의 제재로 화웨이향 물량 및 매출은 감소할 우려가 있다. 반면, 화웨이의 침체로 경쟁 세트업체 고객사의 점유율이 증가할 경우, 이들 업체로의 매출이 증가할 수 있다. 예컨대, 화웨이의 위축으로 삼성전자가 선전할 경우, 화웨이향 매출이 감소하는 대신 삼성전자향 매출이 늘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고객사향 매출은 변동없이 화웨이향 매출만 감소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화웨이의 생산 감소 및 미·중 무역전쟁이 글로벌 경기 악화, 업황 침체로 이어져 시장 수요가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결론적으로 스마트폰, 반도체, 통신장비, 디스플레이, MLCC 등 국내 전자·IT 업계는 현재 미중 무역갈등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 단계에서는 변수가 많아 관망할 수밖에 없다”면서 “반사이익 기대와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시장에 혼재돼 있다. 그만큼 예단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시장 상황이 상당히 급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