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부가 통화 가치 급락으로 경제 혼란에 직면한 터키에 긴급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터키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면 중동 지역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어 새로운 난민이 대량 유입돼 유럽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배경에 깔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독일 고위 당국자 2명의 말을 인용, 올라 슐츠 독일 부총리 겸 재무장관과 터키 베라트 알바이라크 재무장관이 최근 터키 지원을 놓고 협의했다고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유럽투자은행(EIB) 등에 의한 특정 프로젝트에 대한 대출, 독일에 의한 2국간 지원 등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필요한 지원 규모를 파악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터키가 안고 있는 막대한 부채의 대부분은 민간 부문에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6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500억 달러의 지원을 받은 아르헨티나가 참고 사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독일과 터키는 1세기 이상 친밀한 관계였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대통령에 오른 후 독재를 강화하고나서부터 관계가 급격히 냉각됐다. WSJ는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터키에 금융 지원을 실시하게 되면 관계 복원을 위한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9월 28일 독일을 방문할 예정인데, 그에 앞서 슐츠와 알바이라크 양국 재무장관이 베를린에서 미리 만나 금융 지원을 놓고 회담할 예정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키의 외환 위기로 시장이 크게 요동쳐도 무관심한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유럽은 터키 위기가 전염될 것을 우려해 적극 나서는 반면, 미국은 미국인 목사 구속 문제로 터키와 직접 대립하면서 오히려 추가 제재 조치와 새로운 관세 도입을 결정하고 있다.
독일이 우려하는 건 2015년 일어난 유럽으로의 대량 난민 유입의 재연이다. 터키는 중동 난민들이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 중 하나다. 지원받는 대가로 난민을 국경에서 단속하기로 유럽 측과 약속했는데, 경제 위기로 인해 합의가 이행되지 않는 사태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재정 위기에 빠진 나라들은 국제통화기금(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미국이 터키의 IMF 지원 요청에 거부권을 행사할 태세여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 당국자들이 직접 개입에 나설 필요성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환란(換亂)은 악화일로다. 29일에도 리라는 달러에 대해 2% 이상 하락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터키 18개 은행을 포함해 금융기관 20곳의 신용등급을 하향한 탓이다. 소비자와 기업의 체감 경기도 나빠지고 있다. 터키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 및 기업의 경기신뢰지수는 7월 92.2에서 8월에는 83.9로 떨어졌다. 리라 가치 급락과 금융시장 혼란이 실물경제에 심각한 파급효과를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채권시장에서는 터키의 달러표시 채권 가격이 약세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알바이라크 재무장관은 “강력한 펀더멘털 때문에 터키 경제나 금융 시스템에 큰 위험이 없다”고 발언했으나 시장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급기야 터키 쇼크에 다른 신흥시장에서까지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는 1.2%, 멕시코페소는 0.4% 하락했다. MSCI 신흥시장지수는 0.5% 하락했는데, 이달에만 거의 2% 떨어졌다.
시장에서는 내년 7월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터키의 대외채무가 1790억 달러에 이르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터키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규모다. 당장 연말까지 320억 달러 규모의 만기가 도래한다. 달러에 대한 리라 가치가 폭락한 상황이어서 상환이든 만기 연장이든 모두 쉽지 않다. 무디스는 향후 12개월동안 770 달러의 외화 표시 채권과 전체 시장 자금의 41%에 달하는 신디케이트론의 재융자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투자자들은 오는 3일 발표되는 터키 인플레이션 수치에 주목한다. 전문가들은 리라 약세로 인해 인플레이션율이 약 16%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코메르츠방크의 에스더 레이첼트 애널리스트는 “8월 중순 통화 불안정이 향후 경제 지표에 어떻게 반영될지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면서 “물가 지표가 통화 정책이 얼마나 긴급히 대응할 필요가 있는지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