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겨냥해 추진하던 강경한 규제 조치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미국 기업에 대한 중국 투자 제한이 다른 외국 기업들까지 쫓아내 자국 경제에 피해를 줄 것이라는 측근들의 경고를 받아들인 조치로 해석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 자본의 미국 기업 인수 규제를 검토하던 강경책을 보류하고, 대신에 외국 기업 전반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의회에서 개정 절차가 진행 중인 ‘대미 외국 투자위원회(CFIUS)’를 강화하는 법안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 법안은 강력하고 개방된 투자 환경을 유지하면서도 외국인들의 투자에 의해 생기는 새롭고 잠재적 위협에서 미국을 보호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CFIUS는 외국 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 시 안전 보장상의 문제가 없는지 심사하는 정부 기관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이 위원회의 강화로 다양한 위협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원에서는 이미 CFIUS의 심사 권한을 확장·강화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하원에서도 이날 비슷한 법안이 통과됐다. 이 법안을 주도한 의원들은 CFIUS 강화로 충분하기 때문에 별도의 투자 제한 조치는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에서 검토하던 중국을 정조준한 인수 규제는 보류됐다. 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언론들은 중국과의 무역 마찰이 격화할 것을 우려해 트럼프 대통령이 태도를 누그러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백악관은 CFIUS를 강화해 중요한 기술 분야에 대한 중국의 투자를 억제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할 것을 의회에 제안할 방침이다. 경제 비상 사태를 선언하고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발동시키는 쪽이 아니라 기존의 구조를 강화하는, 비교적 온건한 접근 방식을 택한 것이다.
당국자 중 한 명은 언론에 “CFIUS 강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열린 투자 환경을 유지하면서 지적재산권 보호 등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며 “정부의 선택은 중국에 대해 유화적인 접근을 지지하는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므누신 장관은 26일 기자들에게 “CFIUS 강화는 중국 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특정 국가에 대한 심사가 어려워질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 목록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 강경책을 보류한다는 결정에 미중 무역전쟁으로 한동안 얼어붙었던 금융시장은 환호했다. 트럼프가 장기적으로 양측에 손해를 끼치는 갈등을 오래 끌고 가기보다는 중국과의 협상 신호를 보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무역전쟁으로 수출 위주의 경제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로 최근 2주간 7% 가까이 빠졌던 독일 DAX지수는 이날 1% 가까이 올랐다. 뉴욕증시의 S&P500지수는 트럼프의 발표 이후 0.8% 가까이 뛰었다. 그러나 지수는 향후에 대한 불확실성에 다시 소폭 하락세로 돌아섰다.
FT는 트럼프의 이번 결정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완전히 접었다는 의미가 아님을 상기시켰다. 미국은 내달 6일부터 34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며, 중국도 비슷한 방식으로 보복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또 트럼프는 중국산 제품에 최대 4000억 달러의 추가 관세를 부과할 뜻을 밝힌 상태다.
무엇보다, 그동안 트럼프의 시비에 골머리를 앓아온 중국이 이번 조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관건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전 중국 담당 책임자였던 에스와르 프라사드는 “새로운 절차를 만들기보다 CFIUS의 권한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건 추가적인 장애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중국의 대미 투자, 특히 첨단 기술 분야의 투자는 앞으로 상당 기간 추가 조사가 이뤄진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 CFIUS의 조사에서는 미국에 대한 중국 외국인직접투자(FDI)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컨설팅업체 로듐그룹에 따르면 미국에 대한 중국 FDI는 올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90% 이상 감소한 18억 달러였다. 2016년엔 460억 달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