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시바의 반도체 부문 도시바메모리가 약 9개월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SK하이닉스가 속한 한미일 연합의 품에 안기게 됐다.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에 참여했던 3개 진영은 최종 인수자 결정을 둘러싸고 거듭된 반전 탓에 끝까지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당장 자금 조달이 시급한 도시바 입장에서는 모든 진영을 저울질하며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결국 시간 낭비와 신뢰도 저하, 빈약한 리더십만 노출시켰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시바가 이처럼 우유부단한 경영을 노출시킨 배경에는 전문성을 무시한 수직적 인사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은 도시바가 미국 원전 자회사 웨스팅하우스에서 발생한 막대한 적자와 경영 악화 등을 해소하기 위해 알짜사업인 반도체 사업부를 매물로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도시바 반도체 사업부는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삼성전자의 뒤를 이어 세계 시장 점유율 2위인 만큼 업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미국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 일본정책투자은행과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 등으로 구성된 한미일 연합과 대만 훙하이정밀공업, 웨스턴디지털(WD) 진영 등 3개 진영이 도시바 반도체 인수전에 뛰어들어 자금력과 조건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6월께 한미일 연합이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도시바의 사업파트너인 WD의 방해로 협상은 녹록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결국 도시바는 결정을 번복해 WD 진영과 매각 협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경영권을 놓고 이견이 발생했고, 도시바는 다시 한미일 연합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상황이 두어 차례 반복되면서 업계도 도시바의 우유부단함에 두 손을 들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 일본 정부와 빌려준 돈을 떼일까 조바심치는 은행단 등의 입김도 강하게 작용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최종 결정권을 지닌 도시바 이사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쓰나가와 사토시 사장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쓰나가와 사장은 도시바의 의료기기 부문 출신으로 2015년 9월 전사를 총괄하는 부사장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룹의 반도체 거점인 미에 현의 욧카이치공장엔 가본 적도 없다고 한다. 신문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 중대 결정을 내리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라며 이런 리더십의 우유부단함이 도시바의 ‘결정장애’로 연결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전문성을 무시한 업계의 인재육성 시스템의 결함을 지적했다.
신문에 따르면 쓰나가와 사장의 경우, 도시바 입사 후 36년간 의료기기 사업에서 잔뼈가 굵었다. 욧카이치공장에 가지 않았던 건 고의가 아니라 반도체와의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부사장이 될 때까지 원전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도시바에 지금의 위기를 초래한 원흉이 작년 12월 발각된 웨스팅하우스라는 점을 감안할 때 도시바의 위기는 이미 예고된 인재(人災)였던 셈이다.
신문은 쓰나가와 사장과 비슷한 예로 샤프의 다카하시 고조 전 사장을 들었다. 다카하시 전 사장도 샤프 입사 이래 26년간 복사기 사업에만 몸담았다. 복사기는 샤프의 캐시카우 역할을 했지만 경영난에 처한 샤프 재건의 핵심이었던 LCD 사업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사장 취임 후 애를 먹었다. 결국 샤프는 대만 훙하이정밀 손에 넘어갔고 다카하시 사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문은 일본의 수직적 인사 시스템의 구멍을 메꿀 해법으로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쓰리엠 등의 사례를 꼽았다. 이들 기업은 그룹의 다양한 사업을 두루 거치게 하는 순환 인사 시스템으로 전문 경영자를 양성, ‘인재 사관학교’로 불린다. 다만 신문은 이런 시스템이 정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 그룹 계열사를 분사시켜 각각의 전문기업으로 새출발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히타치제작소의 경우, 반도체와 가전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발전과 철도 등 인프라 전문 기업으로 거듭났다. 신문은 이렇게 하면 미세한 반도체에서부터 거대한 원전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업을 총괄해야 하는 경영자의 부담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신문은 이번 도시바메모리 매각은 기업의 근간을 이루는 인재상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