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조조정은 ‘런던 어프로치’를 모델로 삼아 채권은행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일시적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은행의 지원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채권은행이 주도하는 자율협약, 워크아웃 등이 구조조정의 모델로 자리 잡은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있다.
최근 금호타이어 매각이 잡음을 빚으면서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 방식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들의 자금조달 방식이 다양해진데다 은행들이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충당금 적립을 회피하고 있어서다. 오너십이 강한 한국 기업의 특수성까지 더해져 사실상 구조조정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과 시장 참여자들의 중론이다.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 오너십 강한 재벌 앞에 막혀 = 구조조정의 시작은 감자다. 사주(오너)와 일반 주주는 주주손실분담 원칙에 따라 일정 비율로 감자에 참여한다. 채권은행은 대출 만기를 연장하고 이자를 유예한다. 이와 함께 빚을 주식으로 바꾸는 ‘출자전환’에 나선다. 주식은 자본으로 인식되므로 재무구조 개선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감자와 출자전환을 통해 사주의 지분은 낮아지고 채권단의 지분이 늘면서 최대주주가 은행으로 바뀐다.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동안 외부에서 전문 경영인을 선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부실 책임이 있는 구사주에게 경영권을 위임하고 있다. 해당 기업의 경영 경험과 노하우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주목할 부분은 ‘우선매수청구권’이다. ‘채권금융기관 출자전환주식 관리 및 매각준칙(12조)’에 따라 구사주는 우선매수청구권을 갖는다. 국책은행 관계자는 “구사주가 경영정상화를 달성할 경우 경영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경영의지를 독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금호산업, 금호타이어, 한창제지, 팬택, 쌍용건설, 벽산건설 등 국내 기업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받았다.
우선매수청구권은 채권단에도 유리한 옵션이다. 출자전환 주식을 매각해(구조조정 기업 매각) 구조조정에 투입한 자금을 회수하는 채권단 입장에서 우선매수청구권은 엑시트(자금회수)가 가능하다는 보증서와 같다. 문제는 오너십이 강한 한국의 재벌 구조에서 우선매수권은 오히려 구조조정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이다. 채권단은 채권자이면서 대주주임에도 불구하고 구사주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이 현실이다.
금호그룹이 대표적이다. KDB산업은행은 금호산업을 매각할 당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에게 컨소시엄 구성을 허용했다. 금호산업은 그룹 지배구조 상 핵심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 지분을 소유하고 있어 산업은행이 박 회장을 배려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금호타이어는 원칙대로 매각을 진행하고 있지만 상표권 문제 등 구사주인 박 회장 측의 요구 사항을 모두 수용했다. 투자은행(IB) 관계자는 “금호타이어 매각 과정은 워크아웃 제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앞으로 다른 구사주들은 우선매수권을 받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우선매수권 회의론 커져…일본식 ‘관민펀드’ 대안= 이 때문에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에서 시장 친화적으로 바뀌어야한다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와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남아공의 드비어스가 대표적이다. GE는 금융위기 이후 실적이 악화되자 부실이 발생한 금융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수익이 나지 않는 생활가전 사업을 중국 하이얼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보유하고 있는 브랜드 8개 중 절반인 4개가 사라졌으며 미국 내 공장은 47개에서 30개로 통폐합했다.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 가격 하락으로 2015년 상반기에 약 3조 원의 적자를 기록하자 그 해 12월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13만여 명의 직원 수를 5만 명으로 감축하고, 광산 폐쇄 등 자산 매각이 현재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시장 친화적인 구조조정이 어려운 배경으로 ▲자본시장 미발달 ▲소유와 경영의 미분리 ▲채권단의 스탠스가 꼽힌다. 미국의 경우 사모펀드(PEF)가 투자 지분을 엑시트하는 세컨더리 시장이 발달되어 있고 구조조정 PEF의 역사와 전문 인력이 충분하다. 기업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산을 매각하거나 사업부를 떼어낼 때는 주로 자본시장(IB, PEF)에서 이루어 진다. 현석 자본시장연구원은 “시장 친화형 구조조정은 IMF 당시에도 언급됐지만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못 한 한국에서는 쉽지 않다”며 “일본의 ‘산업재생기구’처럼 정부가 리스크 자금을 공급하고 민간 전문가를 불러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관민펀드를 참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민펀드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이 구조조정을 마치고 시장으로 복귀해 투자자 역할을 하며 구조조정 시장을 조성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정부도 이에 공감해 사모펀드(PEF) 등 자본시장의 유동성을 활용하는 기업구조조정 방안을 지난 4월 발표했다. 향후 5년간 8조 원 규모의 기업구조조정 펀드를 조성해 부실기업의 채권을 매입하는 방안이다. 다만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재원조달은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없는 상태다.
이와 함께 IB업계와 채권단 내부에서는 기존경영자관리인 제도(DIP)와 우선매수권 부여 준칙을 개정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재벌 기업의 오너십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필수적인 매각을 방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최고경영자 대부분이 그룹 지주사나 핵심 계열사의 최대주주다. 각 계열사가 서로 지분을 보유하며 지배구조를 이루고 있기에, 오너는 경영권 상실 혹은 기업 매각에 반감이 크다. 주요 계열사가 매각될 경우 오너가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수도 있어서다.
M&A 관계자는 “신정부의 구조조정 제도 개편시 기존경영자관리인 제도(DIP)의 개선요구가 있을것으로 예상된다”며 “미국이나 유럽국가는 DIP를 운영하면서도 기존 경영자 관리인 선임시 엄격한 심사나 채권단의 동의 절차를 거치고 관리인의 권한이 사실상 거의 없는 형태로 운영하는것이 일반적이다”고 말했다.
◆우선매수권이란? 구사주가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고 회사의 경영정상화에 기여할 경우 채권단이 출자전환 주식을 매각할 때 제3자가 제시한 조건 이상으로 우선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