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르(BC 100.7.12~44.3.15)는 귀족들이 모든 것을 틀어쥔 로마에 제정(帝政)의 씨를 뿌린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민중파에 서 있었다. BC 60년대 말~BC 50년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소위 제1차 삼두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뤄 수년간 로마를 지배했다. 그러자 원로원에서 카토, 비불루스 등 벌족파가 강력히 반발했고 키케로도 힘을 보탰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해 로마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히고, 로마에서 처음으로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를 침공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거뒀다. 덕분에 그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카라이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자 로마 정권은 그와 폼페이우스에게 넘어갔다. 둘은 이후 목숨을 건 한판 대결을 벌였다. 이 와중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에 루비콘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BC 49년 내전이 일어났다. 이후 파르살루스전투와 탑수스전투 등에서 승리해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했다.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도로 건설, 율리우스력에 의한 달력 개정 등 광범한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했으며, 급기야 종신 독재관에 올랐다. BC 44년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 복귀를 위해 그를 암살했다. 로마는 다시 내전 상태에 빠졌지만, 결국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장악하고 영속적인 전제정을 세웠다. BC 42년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추인했다.
그는 글도 잘 썼다. 전쟁 기록 ‘갈리아 전기’ ‘내란기’를 통해 그의 생애가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쓰이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다 카이사르의 성공에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