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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220~280년)에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184~234)은 서기 227년 위(魏)를 치기 위해 북벌에 나서면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선제(先帝) 유비(劉備)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불철주야 노심초사해온 제갈량의 충렬이 담긴 명문이다. 출사표를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그 뒤 228년에 제갈량이 다시 올린 글을 후출사표라고 한다. 후세의 위작이라는 말이 많은 이 글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가 나온다. “삼가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할지니 죽은 후에나 그칠 따름”이라는 말이다. 국궁은 몸을 구부린다는 뜻이며 진췌는 몸이 병들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는 정성이다.
위작이라고 보는 이유는 정사(正史) ‘삼국지’ 원문 및 ‘제걀량전집’에 실려 있는 전출사표와 달리 출처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장의 분위기가 판이하다. 전출사표에 제갈량의 맑고 곧은 인격이 잘 드러난다면 후출사표는 내용에 비루한 점이 있다. 소동파가 평했듯 전출사표는 죽음을 각오하고 출정하면서 울음을 억누르며 말하는 간결함과 곧음[簡而盡 直而不肆]이 있는 반면 후출사표는 매우 장황하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신은 몸을 바쳐 죽을 때까지 애쓸 뿐 그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을 미리 내다보는 데 밝지 못합니다.” [臣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睹覩也] 그러나 어쨌든 국궁진췌는 예부터 많이 인용돼온 명구다. 27년간 중국 공산당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의 좌우명이 이 여덟 글자였다.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蔣介石·1887~1975)는 후출사표에 나오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을 인용하면서 중화민국이 유일 합법정부이며 대륙도 중화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한 바 있다.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