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교원생활 후 상경, 이후 조선여성동우회, 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9년 ‘나의 어머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28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했으며, 1930년 도일하여 니혼(日本)대학 예술과에 다니면서 연극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1933년 결혼하지만 2년 만에 이혼하였고 1938년 오빠 기호와 중국 상해를...
‘가정위생’, ‘각오하여 두어야 할 조선여자의 천직’, ‘민족발전에 필요한 아이 기르는 법’ 등의 연재물은 여성의 월경, 임신, 아이 양육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 이런 점에서 허영숙은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남편 내조와 아이 양육에 힘쓰는 ‘현모양처’, 즉 근대적 성별 역할분담론의 생산자이자 전파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민족의 독립과 계몽에 앞장서던...
1924년에는 허정숙, 주세죽, 정종명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한다. 이듬해에는 다시 일본으로 가 도쿄기예학교(東京技藝學校)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재봉, 편물, 자수 등을 배우는 동시에, 도쿄 여자유학생들이 결성한 사회주의 여성단체 삼월회(三月會) 활동에 깊이 개입했다.
1926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하는 한편 1924년 5월에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 초에는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 등으로 사회주의 여성단체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아갔다. 1927년의 신간회 참여와 동시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전국을 누비며 여성의 사회 의식화, 빈민 구제 등 활동의 폭을 넓혀 갔다.
1929년 8월...
졸업 후 귀국해서도 여성과 부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대일보, 중외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조선여성동우회, 직업부인회, 근우회(槿友會) 등의 조직에 참여했다. 근우회 활동을 하면서 경성여자소비조합운동에도 참여했다. 1929년에는 임봉순(任鳳淳)과 결혼했다.
1934년 여자의학강습소를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로 만들기 위한 여자의전...
그는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비롯하여, 5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5년 1월에는 주세죽·김조이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등 여성운동계에서 맹활약하였다. 또한 1925년 8월에는 ‘신여성’ 잡지에 특집 ‘단발호’를 실어 여성 단발을 주창하는가 하면, 수가이(秀嘉伊·sky)라는 필명으로 1928년 1월 동아일보에...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이어 근우회에 이르기까지 항일 민족 투쟁과 여성운동에 심혈을 쏟았다.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 당시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이듬해 7월 임시대회에서 준비위원장으로, 다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조직과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0년 1월 서울지역 여학생 만세운동 사건에 배후 관련자로...
그는 1924년 5월 정종명, 허정숙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 집행위원으로 선임돼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또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1926년 4월 정우회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1925년 1월 창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5월 창립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