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1897~1975)은 예나 지금이나 이광수의 처로 유명하다. 그와 결혼하는 순간, 인간 허영숙은 춘원(春園)의 아내로 더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광수란 인물이 워낙 걸출하기도 했고, 가부장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며, 그녀 자신의 한계일 수도 있다. 허영숙은 지금껏 어떤 의미에서건 한국의 근대여성사에서 그다지 시선을 끄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 또한 기자로서, 의사로서, 그리고 주부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장안의 대표 신여성들과 함께 어깨를 견주며 한 축의 식민지 여성 담론을 생산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허영숙은 1897년 서울의 부유한 상인 허종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진명여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간다. 도쿄에서 이광수를 만나, 그의 이혼 후 서울에서 결혼한다. 결혼 후 허영숙의 삶의 상당 부분은 병약한 남편의 병수발 및 내조에 충실한 아내였다. 또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자녀 양육에 정성을 다한 주부이기도 했다.
반면 허영숙은 의사로서 정체성도 겸비했다. 그녀의 의사 이력은 의전 졸업 후 1917년 여성 최초로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하면서 시작된다. 곧이어 여성 최초로 병원을 개업하는데, ‘영혜병원’이라 이름 지은 이 병원은 산부인과와 소아과 전문병원이었다. 의사 허영숙의 야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아, 결혼 후에도 두 번이나 일본 유학을 시도할 정도였다. 특히 세 번째 도쿄 행은 37살에 어린 자식 둘을 품에 안고 떠난 길이었다. 이조차 1937년 6월 춘원이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 반 만에 중단되었지만, 다시 국내 최초의 민간 산원이라는 ‘허영숙 산원’을 개원하여 산모들을 돌봤다.
허영숙은 또한 ‘동아일보’에서 2년 남짓 기자생활을 했다. 그녀의 기사와 논설은 의학 지식에 기반한 가정 위생에 관한 것이었다. ‘가정위생’, ‘각오하여 두어야 할 조선여자의 천직’, ‘민족발전에 필요한 아이 기르는 법’ 등의 연재물은 여성의 월경, 임신, 아이 양육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 이런 점에서 허영숙은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남편 내조와 아이 양육에 힘쓰는 ‘현모양처’, 즉 근대적 성별 역할분담론의 생산자이자 전파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민족의 독립과 계몽에 앞장서던 그녀의 삶은 마침내 친일 행각으로 얼룩진다. 식민지 말기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오(香山光郞)로, 허영숙은 가야마 에이코(香山英子)로 창씨개명하고 본격적으로 전쟁 협력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행보는 해방 후 그들의 결혼을 파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회부되자 합의이혼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다. 허영숙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다 지병으로 숨진 전 남편 이광수의 원고를 모두 모아 ‘춘원전집’을 완간하였다. 그 외 별다른 활동 없이 살아가다 1975년 77세의 나이에, 화려했지만 한도 많았을 세상을 등진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