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죽(1901~1953)은 함흥의 사립 영생여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가해 한 달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 후 병원에서 잠시 근무하다 1921년 4월 상하이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 여학교에서 1년 남짓 영어와 음악을 공부하면서 박헌영을 만나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 이때 여운형의 도움으로 박헌영과 혼례도 치렀다.
그는 1924년 5월 정종명, 허정숙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 집행위원으로 선임돼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또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1926년 4월 정우회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1925년 1월 창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5월 창립된 근우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이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는 동안 서대문 근처 맨포드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박헌영의 옥바라지를 했고 자신은 영양실조, 결핵에 시달려야 했다.
1927년 11월 임신 중이던 주세죽은 가출옥한 남편과 함께 변장해 1928년 9월 소련으로 탈출했다. 이때 낳은 딸은 모스크바 근교의 육아원에 맡겨졌다.
김단야, 고명자 부부의 도움으로 남편은 레닌대학에,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니며 소련 국적도 얻었다. 1932년 초 상하이 등지에서 ‘꼬뮤니스트’ 잡지를 발행하는 등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펼쳤다.
1933년 7월 박헌영이 세 번째 수감된 후,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대학에 복학하고, 외국인 노동자 출판부 조선과의 교정원 일도 했다. 이듬해 김단야와 결혼하였으나 그가 스탈린 정부에 체포되면서, 그 역시 1938년 3월 체포돼 5년 유배형을 받고 카자흐스탄에서 복역하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유배지에서 바로 죽었다.
해방 후에도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한 채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53년 3월 박헌영의 숙청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던 딸에게 가던 중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로 민족과 여성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혹독한 고난의 삶을 살았다. 1989년 3월에야 복권되고, 2007년에는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