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인 아버지 허헌을 존경하며 온갖 보살핌 속에 잘 자란 그였지만, 어려서부터 남녀 불평등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남편 임원근의 거듭되는 투옥에, 사회주의적 사랑과 투쟁에 물든 그는 기다림을 모른 채 신일룡, 송봉우, 최창익 등 여러 남자들과 사랑하며 활동하였다. 덕분에 ‘한국의 콜론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연인들과 동지로 항일 투쟁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비롯하여, 5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5년 1월에는 주세죽·김조이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등 여성운동계에서 맹활약하였다. 또한 1925년 8월에는 ‘신여성’ 잡지에 특집 ‘단발호’를 실어 여성 단발을 주창하는가 하면, 수가이(秀嘉伊·sky)라는 필명으로 1928년 1월 동아일보에 ‘부인운동과 부인문제 연구’를 3회 연재하는 등 여성 의식 계몽을 위한 글을 쏟아냈다. 여기자에서 광선 치료사까지, 사회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도 스스로 해결하는 가운데 월급을 몽땅 털어 운동 경비에 쓰고, 부족하면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였다.
첫 남편과 이혼한 뒤 1926년 5월 아버지와 세계여행을 떠나,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6개월간 수학하기도 했다. 귀국 후 기자생활을 하면서 1928년 7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1930년 근우회(허정숙)사건으로 불린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으로 검거되어 1년 6개월형을 받아 투옥되었다. 출산을 위한 병보석 후 다시 수감되어 1932년 3월 만기 출옥하였다.
1934년 최창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5년 여름 난징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다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 연안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항일군정학교 정치군사과 수료 후 중국 팔로군의 정치지도원을 지내다, 1942년 화북조선독립동맹 지부활동과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남녀 가리지 않고 엄하게 가르쳤다. 당시 그는 큰누님으로 불렸으나, 대접받기보다는 고락을 함께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연안파’ 중에 드물게 살아남아 인민해방 선전용의 조선로동당출판사를 책임지고 김일성에게 충성했다. 이후 북한의 주요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노년기엔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란 것으로 지극한 모성도 보였다. 아버지 덕에 잘된 자신처럼 자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으리라. 90세 넘어 세상을 떠난 그를 북한에서는 크게 애도했다고 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