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관람객이 5G 스마트폰에서 금천교를 향해 비추면 섬광이 일어나면서 전설 속 동물인 '해치'가 나타난다. 커다란 눈망울과 푸른 피부의 해치는 창덕궁의 금천교부터 인정전, 희정당, 후원입구까지 총 12개 코스별로 안내를 해준다.
SK텔레콤이 27일 문화재청, 구글코리아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창덕궁을 5G MEC 위에
현대백화점이 유명 맛집의 레시피를 활용한 양념 고기, 전통 식품 명인의 노하우를 담은 선물세트 20여 종을 선보인다고 9일 밝혔다. 준비 물량은 총 2만 세트다.
현대백화점은 전라도 광주 향토음식 ‘송정골 한우 떡갈비 세트(10만 원, 1.8㎏)’와 조미료 맛을 줄이고 대파를 이용해 단맛을 내는 것이 특징인 ‘마포서서갈비세트(15만 원, 2㎏)’를 판
내일 한글날을 앞두고 특별히 상기하고 싶은 자료가 있다. 바로 ‘낙선재본 한글 고전소설’이다. 지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모두 84종 2000여 책이 보관되어 있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 조선의 24대 임금으로 문화적인 감수성이 탁월했던 헌종(憲宗, 1827~1849)이 당시 후궁이었던 경빈(慶嬪) 김씨를 위하여 지은 집이다. 이 낙선재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외아들인 고 이구(李玖) 씨의 전 부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는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에서 이구와 처음 만났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설계사무소를 다녔던 줄리아는 직장 동료 중 독특한 동양 청년에게 끌렸고, 이후 27세 이구와 35세 줄리아는 백년가약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고명딸로서 황실뿐만 아니라 국민의 큰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옹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고종은 1916년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옹주가 다닐 수 있게 하였다. 왕녀 중 공식적으로 유치원에 입학한 사람은 덕혜옹주가 처음이다.
지난해 3월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서양화가 김병기(金秉麒)의 ‘백세청풍(百世淸風):바람이 일어나다’ 전시회가 열렸다. 1916년생 이중섭(李仲燮)과 동갑인 김 화백은 이미 우리 나이로 101세였지만, 여전히 붓을 잡는 현역이다. ‘그늘의 노인’이라는 유화로 1958년 제9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서양화가 장리석(張利錫)도 1916년생. 눈과
[카드뉴스 팡팡] #고종#보온병#정략결혼… 키워드로 본 덕혜옹주의 삶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했습니다.영화 포스터의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카피가 눈에 들어오는데요.
한일합방·광복…역사의 격랑 속에서 비운의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삶을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고종191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실존 인물인 덕혜옹주의 삶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덕혜옹주는 1912년 조선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러나 유일한 울타리였던 아버지 고종이 사망한 이후 비운의 삶을 살게 된다.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는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1930년부터 몽유병을 앓기
책(book)과 사람(人)의 이야기를 담아온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이번 호에는 그 의미를 살려 책을 통해 맺어진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박상진(朴相珍·76)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와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다. 지난해 3월호에서 박 회장은 박 교수가 쓴 를 추천했다. 박 회장은 그전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 박 교수의 책을 호평했고, 이
이방자(李方子, 1901.11.4~1989.4.30) 또는 이본궁 방자(梨本宮 方子)는 일본제국의 황족(메이지 천황 조카)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妃)이다.
그녀는 황태자 히로히토(裕仁)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였으나, 불임녀 판정을 받고 간택되지 못했다. 조선 왕실 절손(絶孫)의 간계가 숨은 정략결혼을 한 그녀는 결혼 다음
덕혜옹주(德惠翁主·1912.5.25~1989.4.21)는 고종이 회갑 되던 해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고명딸이다. “회갑 해에 태어난 자식은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속담대로 덕혜옹주는 고종의 축소판 같았다. 바로 그 전해에 엄비를 잃은 고종에게 왕녀의 탄생은 큰 기쁨이었다.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福寧堂)이라는 당호를 내리고, 다음 날 산실에 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