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오너 리스크’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현재 검찰 조사를 포함해 사법부에 명운이 걸린 재벌 총수만 6명에 달하는 등 내년 경영 기상도에 짙은 안개가 꼈다. 이번 사태로 대규모 신규 투자를 포함, 해당 기업들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따를 전망이다.
17일 재계에 따르면 오너 리스크를 겪고 있는 대다수의 대기업들이 내년 경영 전략을 방어적으로 짜고 있으며, 일부 기업은 아예 예년 수준의 현상 유지에 주력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인수·합병(M&A)와 같은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 내야할 기업 입장에서 오너의 부재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SK그룹이 올해 초 STX에너지의 인수를 포기한데 이어 최근 보안업체인 ADT캡스 인수전 불참을 선언한 것이 단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현재 횡령·배임, 탈세 등 각종 경제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대기업 오너들은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등이다. 1961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 시절 부정축재자로 몰려 14명의 오너들이 한꺼번에 구속된 이후 50년 만에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1961년 5월 군사정권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린 정재호(삼호방직)·이병림(개풍상회)·설경동(대한방직)·남궁연(극동해운)·조성철(중앙산업) 등 11명의 기업인 1세대가 한꺼번에 옛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에 감금됐고, 당시 일본에 있던 이병철(삼성)·이양구(동양시멘트) 회장 그리고 백 회장의 아들 백남일 등 3명에게도 구속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기업인들이 산업재건에 이바지하게 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한 달여 뒤 모두 사면됐고 그해 7월 이들 기업인 13명이 모여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경제재건촉진회’를 설립했다.
50여년 만에 재현된 오너들의 대거 부재로 재계는 신사업 추진 계획을 보류하거나 인수 협상을 중단하는 등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수직계열화를 완성, 미래를 태양광 사업에 맡긴 한화는 더 이상의 투자를 못하는 실정이다.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이후 기대했던 추가 수주는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CJ의 핵심 계열사들도 신사업 추진에 보수적으로 돌아섰다. CJ제일제당은 중국 라이신 업체 인수 협상을 잠정 중단했다. 이번 사안은 CJ제일제당의 글로벌 바이오 사업 선도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협상이었다. CJ대한통운의 경우 이 회장 구속 이후 1조원대 규모의 미국 물류 업체 인수를 잠정 보류하기도 했다. 효성은 최첨단 신소재인 폴리케톤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만큼 내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해야 하지만 조 회장 사건으로 의욕이 꺾인 상황이다.
지난 8월 구 회장이 구속된 LIG는 그룹의 축인 LIG손해보험을 매물로 내놨다. LIG그룹의 지난해 매출 12조원 중 LIG손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86%(10조3000억)에 달하는 만큼, 사실상 그룹 해체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기업인 1세대부터 우리 경제는 빠른 결정과 과감한 투자가 가능한 오너 경영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만큼, 총수들의 무더기 구속 사태가 주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면서 “전문경영인도 오너 부재의 부담으로 도전보다 안정에 집중하게 돼 장기화될 경우 경쟁력을 크게 상실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