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는 기업 내부에서도 극도의 보안 사항이어서 뚜껑을 열기까지 누구도 모르는 법. 그러나 각 그룹별, 기업별로 총수 일가의 재판, 경영성과 평가, 인사 적체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하면서 인사의 향배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 삼성그룹, 전자 DMC부문장 주목 =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12월 초에 인사를 단행할 계획이다. 사상 최대 실적을 거듭하고 있는 만큼 대대적인 승진인사가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경기 불확실성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이 거듭 강조되고 있는 만큼, 공격적인 인물보다는 안정과 관리에 강한 인물들이 전면에 부상할 것으로 관측된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삼성그룹 핵심인 삼성전자의 2인자 자리로 평가되는 DMC부문장이다. DMC부문장은 삼성전자의 완제품 사업을 총괄하는 자리로, 지난 6월 최지성 부회장이 삼성미래전략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공석으로 남아있다. 현재로서는 세트사업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신종균 사장과 윤부근 사장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러나 관리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윤주화 사장이 DMC부문장에 낙점되는 깜짝 인사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올해 새롭게 출범한 삼성디스플레이 대표 자리도 이번 인사의 관전 포인트다. 현재는 권오현 부사장이 삼성전자의 대표직을 맡으며, 삼성디스플레이의 대표까지 겸직하고 있다. 업계는 조수인 삼성디스플레이 사장과 김종중 삼성전자 DS부문 사장을 후보자로 거론하고 있다.
◇ 현대차그룹, 부회장단 축소 유력 = 재계서열 1위인 삼성그룹 부회장단(미래전략실 포함 5명)보다 상대적으로 비대한 부회장단(2011년 기준 12명)을 축소하는 방안이 이번 인사에서 반영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특히 정몽구 회장은 최근 미국시장 ‘연비 오류’ 사태와 관련해 남양연구소의 혁신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심차게 준비한 기아차 플래그십 K9의 부진, 내수판매 감소와 맞물린 수입차 대응 미숙 등도 이번 인사에 영향을 줄 것으로 분석된다.
그룹 총수가 혁신을 주문한 만큼 연구개발 본부의 인사 여부가 주목된다. 현대차는 미국시장 연비과장 발표 직전, 연구개발 본부에 현대오트론 권문식 사장을 발령했다. 그는 향후 연구개발 분야에서 정몽구 회장의 오른팔로 활약할 것이라는 전망이어서 초고속 승진이 조심스럽게 점쳐진다.
현대제철 박승하 부회장 역시 이번 인사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룹내 최장수 부회장으로 이름을 올린 박 부회장은 지난해부터 ‘부회장단 축소’와 관련해 거취가 주목돼 왔다.
일각에서는 박 부회장과 함께 장수 CEO로 불리는 글로비스 김경배 대표 역시 올해는 안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러나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비서를 시작으로 정몽구 회장의 비서를 거친 그의 입지가 쉽게 무너질 리 없다는 시각도 많다.
◇ LG그룹, 인화보다 특단 조치 = 올 연말인사를 앞두고 어느 그룹보다도 긴장감이 높다. 구본무 그룹 회장이 올해 임원 인사부터 엄격한 성과주의를 적용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 전통적으로 인화를 강조해왔지만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지고 있는 LG를 되살리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구 회장이 이번 인사에서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나 사업부 수장을 물갈이하고, 공격적인 젊은 인재를 수혈할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LG전자의 경우, 휴대폰 사업을 중심으로 조직 변화와 인사폭이 클 가능성이 있다. 연구소장 출신의 박종석 MC사업 본부장이 제품 경쟁력을 경쟁업체와 대등하게 이끌었다면 이제는 마케팅 강화를 위한 인사가 뒤따를 것이라는 시각이다.
지난 3분기 사상 최대 분기 매출과 흑자전환을 동시에 달성한 LG디스플레이 한상범 대표이사 부사장의 사장 승진 가능성도 충분하다. 시가총액만을 놓고 보면 LG디스플레이는 LG화학, LG전자에 이어 그룹 내 세 번째로 큰 규모지만, 전자와 화학의 대표가 부회장인 반면 디스플레이는 부사장급이다.
◇ SK그룹, 오너 리스크가 변수 = 매년 12월에서 다음해 1월 사이 정기인사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올해는 내·외부적인 변수로 인사 시기나 폭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경영시스템의 변화다. 지난달 최태원 회장의 제안으로 논의된 ‘따로 또 같이 3.0’ 경영체제가 이달 말 확정된다. 새로운 경영체제는 그룹 산하에 업무 영역별로 나눠져 있는 6개 위원회에 실질적인 합의 기능을 갖추게 하고 사업 연관성이 큰 계열사 CEO를 참여시켜 자율 경영을 유도하는 게 핵심 골자다.
또한 지주회사(SK)의 권한과 역할은 위원회로 대부분 이양되기 때문에 ‘따로 또 같이 3.0’의 세부안에 따라 인사도 달라질 수 있다.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선고공판이 이달 말로 예정된 것도 인사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재계 일각에서는 오너 리스크와 인사는 별개로 봐도 될 것 같다는 전망도 나오지만,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조기에 단행하거나, 아예 예년보다 뒤로 밀릴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