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수합병(M&A)은 전쟁이다. 기존 사업이 이익을 내는 데 한계에 부딪치거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때 M&A에 나서는 만큼 치열한 경쟁이 뒤따른다.
승리한다 해도 안심할 순 없다. M&A 성공이 오히려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재앙으로 다가오는 사례가 많다. 일명 이기고도 진다는‘승자의 저주’. 글로벌 경제 위기 여파에 휘말리고나 이로 인해 인수하려는 기업의 주식가치가 하락하는 등 예기치 못한 사건이 저주의 시작이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로 국내 주식시장이 급락하면서 대한통운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CJ그룹이나 하이닉스 인수전 참여를 선언한 SK그룹과 STX 그룹 모두 이같은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판세 분석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6월 말 CJ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주당 21만5000원이라는 인수가격을 제시해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다. 포스코와 삼성SDS 컨소시엄이 유리할 것이라던 시장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통 큰 베팅’에 힘입은 승리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CJ그룹이 대한통운 M&A 절차를 밟는 가운데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폭탄을 맞게 된 것이다. CJ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이래 줄곧 하향 곡선을 그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이달 들어 10만원을 웃돌던 대한통운 주가는 지난 2일부터 6거래일 연속 큰 폭으로 하락했다. 심리적 마지노선인 8만원도 뚫렸다.
지난주 대한통운에 대한 실사를 일단락 한 CJ그룹은 이번주 정밀 실사를 마친 뒤 최종 가격 흥정을 앞두고 매물 값을 깎기 위한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하지만 인수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한도를 3% 이내로 제한키로 양 측이 합의한 것으로 전해져 대한통운의 고가 인수는 불가피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한다.
CJ그룹은 정밀 실사와 가격 합의를 마친 이후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 결합 신고를 거쳐 대금 납입을 완료해야 대한통운의 최종 주인이 될 수 있다. 지난 달 15일 산업은행과 본계약을 체결한 CJ그룹은 이미 계약금 2200억원 정도를 지불한 상태다.
채권단 관계자는 “CJ그룹이 매각자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맞춰줄 정도로 인수 의지가 컸다. 당초 예상보다 몸 값이 과도하게 뛴 인수 대금을 조달하는 것도 관건이고 이후 대비책 마련도 중요하다”고 전했다.
대우건설 인수 과정에서 대우건설 주식에 풋백옵션을 걸고 대출을 받았다가 이를 감당하지 못해 그룹 전체가 위기를 겪게 된 사례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 2006년 자산관리공사로 부터 대우건설 지분 72.1%를 6조4255억원에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인수자금의 절반이 넘는 3조5000억원을 금융권 등으로 부터 조달했다.
특히 대우건설 인수 당시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약속했던 풋백옵션은 금호아시아나를 유동성 위기로 빠뜨리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금호아시아나가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대우건설 인수자금을 빌리면서 대신 3년 뒤인 2009년 12월 15일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3만2500원이 안 되면 주식을 되사 주겠다고 약속한 것.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와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대우건설 주가는 급락했고 결국 재무적 투자자들의 주식을 되사는데 4조원 이상이 필요하게 됐다.
대우건설 인수과정에서 발생한 풋백옵션 손실 우려와 계열사 영업실적 부진 등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되면서 2009년 6월 1일 계열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또 풋백옵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호아시아나는 3년이 채 안돼 대우건설을 재매각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매각과정에서 국내 대기업들의 참여가 전무했다. 우선협상 대상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모펀드 두곳이 결정됐고 산업은행이 매각 주관사에서 빠지면서 매각이 무산된다.
결국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 뿐 아니라 금호터미널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지분은 물론 금호생명, 금호렌터카까지 알짜베기 계열사들을 모두 시장에 매물로 내놓게 되는 처지에 놓인다.
같은 해 11월 인수계약 양해각서를 체결했지만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는 등의 이유로 인수를 포기했다. 한화는 이 과정에서 미리 지불한 3150억원의 이행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자 소송을 냈지만 올 2월 있었던 판결에서 패배했다. 인수 포기 댓가로 3150억원을 지불한 꼴이 됐다.
당시 한화의 인수 포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전세계를 뒤덮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자금조달 어려움이 가장 컸다. 금융시장이 극도로 경색되면서, 당초 계획했던 자금조달 방안도 불가피하게 차질을 빚은 것.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를 약속했던 기관들은 하나같이 금융시장 여건 악화를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당시 한화 컨소시움은 이같은 절박함 속에서도 각 사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선실사 후계약, 대금 분납과 납입기한 연기, 주식 분할 매각 등 본 거래의 성공적 종결을 위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산업은행 측에 여러 차례 호소했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사모펀드에 의한 자산매입 협조 이외에는 양해각서에 규정된 내용을 변경할 수 없다는 원칙만을 강조했고 결국 인수를 포기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