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복싱 이야기부터 할까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해 9월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 한화그룹 중소기업 상생협약식 자리에서 출입기자들과 만나 던진 첫 얘기다.
김 회장의 '복싱사랑'은 체육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 때문일까? 김 회장은 치열하게 치고받는 복싱경기가 사업과 흡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날 그는 "뭘 해도 복싱이다. 신사업도 복싱이고 M&A도 복싱"이라고 말해 각별한 '복싱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김 회장의 '복싱사랑'은 그동안 체육계에서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김 회장은 30여 년 동안 국내외 경기단체의 주요 직책을 맡으면서 대한민국 체육계 발전에 헌신해 왔다. 또한 스포츠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온 대표적인 기업 경영인이자 체육인이라는 게 김 회장에 대한 체육계의 평가다.
특히 복싱과 사격 종목에서 30년 가까이 국내외 다양한 직책을 성공리에 수행해온 경륜을 갖췄으며, 그동안의 성과들은 우리나라 스포츠의 중흥과 발전에 눈부신 업적으로 기록돼 있다.
◆남다른 정열로…아마복싱史 '신화창조'
"스포츠는 정정당당해야 한다. 지더라도 당당한 게임, 깨끗한 경기를 펼쳐 달라."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수들에게 스포츠맨십을 강조하는 김 회장은 학창시설 아마복싱 선수로 활약한 인연으로 1982년 대한아마복싱연맹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1997년 사퇴할 때까지 대한체육회 산하 가맹단체 회장 중 가장 오랜 기간인 15년 동안 재임했으며 그동안 김 회장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아마복싱사(史)에 큰 궤적을 남겼다.
김 회장 재임기간 동안 한국의 아마복싱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 1984년 L.A.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복싱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세계복싱사상 전무후무한 12개 전체급 금메달의 위업을 달성해 한국이 일본을 따돌리고 종합 2위를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김 회장 재임기간동안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209개, 은메달 112개, 동메달 188개 획득은 경이로운 수치인 것이다.
이렇듯 아마복싱의 눈부신 발전의 결과는 김 회장의 파격적인 예산 지원과 경기력 향상을 위한 각종 조치, 그리고 국제행사 유치를 통한 위상 제고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복싱 관계자들은 당시를 회고했다.
그동안 정규예산 75억원 외에도 각종 행사비와 포상금 등으로 23억원을 지원해 총 100억원의 예산을 지원했으며 보리스 기트만·밥 도시·유리 최 등 외국인 코치를 초빙하고 각종 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들의 지도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는 '포인트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경기력 향상과 선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김 회장의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내어 태능선수촌에서 훈련에 여념이 없는 복싱 선수들을 찾아 컨디션상태를 점검하고, 선수들이 마음 놓고 운동에 몰입할 수 있도록 각종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
김 회장의 복싱에 대한 열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84년의 L.A. 올림픽 때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엄청난 텃세 속의 L.A 올림픽에서는 연속되는 불공정한 판정과 심판 배정으로 한국 복싱팀은 악적고투하고 있었으며 국제 언론에서는 'Los Angeles'가 'Loss Angelless'로 타락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에 김 회장은 즉각 공식기자회견을 요청해 "앞으로의 경기에서 공정한 판정에 대한 보장이 없을 경우 한국 선수단의 철수까지도 고려하겠으며, 한국은 차기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많은 것을 배우러 왔는데 이러한 불공정한 판정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겠는가?"하며 '공식제소→외신기자 회견→특정심판이 특정경기에 배정된 결과를 증명해주는 심판배정표의 분석 결과 발표→국제복싱연맹 집행위원회를 통한 강경한 항의'의 순으로 조직적이고 정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허탈에 빠졌던 타국가의 팀들까지 한국의 냉철한 항의조치에 힘을 찾고 있다"라고 많은 외신기자와 보도진들이 격려를 보내왔고, L.A.타임즈의 한 기자는 선수들에게 "너희들의 리더는 대한하구나"하며 "이제 누구도 한국팀을 얕잡아 보는 사람은 없게 되어가고 있다"고 부언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심준섭 선수가 결승전을 갖기 직전에는 심판위원장이 경기에 배정된 심판 명단을 김 회장에게 보여주며 "이 정도면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웬만해선 볼 수 없는 해프닝이었다.
김 회장은 "모든 것은 단지 공정하면 될 뿐이다. 우리 선수들에게 나는 '떳떳하고 후회없는 경기를 펼쳐라. 그러면 그 대가는 공정하게 받을 것"이라고 항상 강조해왔다"면서 "나는 우리 어린 선수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쓸 뿐이다"라고 말했다.
신준섭 선수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유렵의 한 임원은 김 회장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정말 값진 금메달입니다. 미국을 물리친 나라는 사실상 한국 이외는 없습니다."고 전했다.
이로써 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라는 드라마는 완성될 수 있었다.
◆대(代)를 이어 약속 지킨 프로야구 제7구단 탄생
그러나 김 회장이 프로야구단을 창단한 목적은 기업홍보 이전에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고자 함도 있었다.
선대 현암회장은 1980년에 천악북일고등학교 야구팀이 창단 3년만에 봉황기와 화랑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실업야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실업야구단을 발족시킬 사이도 없이 세상을 떠났고, 실업야구는 프로야구의 등장으로 설 땅을 잃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 김 회장은 한화 직장야구팀인 '다이나마이트'팀을 적극 지원하면서 해마다 개최되는 코트라(KOTRA)기 쟁탈 직장야구대회에 출전시켜 1984년도 대회에서는 패권을 차지하는 등 프로야구단 창단의 꿈을 가꾸어 왔다.
그러나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던 프로야구단 창단의 꿈은 의외의 복병으로 좌절될 뻔했다. 그 오랜 여망이 막 꽃봉우리를 피울 때 쯤 프로야구위원회측이 가입비로 30억원이라는 거금을 요구해 온 것이다. 기존 구단의 기득권을 이용한 하나의 횡포였던 것이다.
대기업의 입장에서 30억원이라는 돈이 큰 액수라는 점도 있지만 김 회장은 "한화그룹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임직원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과 씨름하며 생명을 담보로 땀과 눈물을 흘려온 역사가 있다. 명분 없이 돈을 쓴다는 것은 그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며 끝내 가입비 30억원의 요구를 뿌리쳤다.
이후 프로야구 발전을 위한 실질적 지원으로 야구회관을 건립해 기증하는 조건으로 1986년 프로야구 제7구단으로서 '한화이글스'를 창단했다. 또 김 회장은 11억원을 투입해 대전구장을 개축, 보수하는 한편 4억4000만원을 들여 청주구장에 야간조명시설을 설치했다.
창단 이후 '한화이글스'는 1992년 페넌트레이스 1위 외에도 한국시리즈 준우승 5회의 명문 구단으로 발전했고 한화그룹이 구조조정을 마무리지은 1999년 말에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20세기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비인기 스포츠로 제2의 성공신화 만든다
복싱에서 성공신화를 만들었던 김 회장은 사격과 같은 비인기 스포츠에서 다시 한번 성공신화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김 회장은 2002년부터 사격연맹 명예회장직을 맡아 정체돼 있던 사격계의 새로운 부흥기를 선도해오고 있는 것. 김 회장의 집중적인 지원 아래, 여자 공기소총과 같은 특정 종목에서만 강세를 보이던 한국 사격은 클레이, 권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정상권의 실력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16년 만에 금메달 획득에 성공함으로서 복싱에 이어 사격에서도 제2의 성공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외에도 김 회장은 국내 골프수준의 향상과 국제수준 대회로의 발전을 위해 1990년부터 '한화컵 여자골프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김 회장은 단지 국내 스포츠를 지원하는데 그치지 않다. 이미 국제 복싱계에서 성공적인 외교 역량을 검증 받은 바 있는 김승연 회장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의 적극적인 역할로 한국 스포츠의 위상 제고에 크게 기여해온 것이다.
먼저 오랜 기간 기업경영인으로서 그리고 체육계 인사로서 구축해온 해외 정계, 재계, 스포츠계의 탄탄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올림픽 등 국제대회 유치활동에 적극 앞장서왔다.
1983년에 이어 2007년에 그리스 명예총영사로 재임명된 김 회장은 그리스 정·관계 주요 인사들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며 국제대회의 국내 유치 시 적극적인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동안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과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 및 아시아 지역 회장 그리고 아시아경기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지속해온 스포츠 외교도 남다르다.
발군의 성적으로 전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공식적인 외교채널이 부재했던 동독, 쿠바 등 비수교국을 1983년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 집행위원회 개최를 계기로 한국에 불러 정치·외교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또한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과도 아시아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 자격으로 회동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 기대하기 힘든 부분을 민간외교 차원에서 훌륭히 수행해왔다.
김승연 회장은 이같은 체육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체육훈장 백마장 수훈에 이어 1984년 체육훈장 맹호장, 1986년 체육부문 최고 훈장인 청룡장을 수훈했으며, 1987년에는 대한민국 체육상과 한국기자연맹이 선정한 체육상(공로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