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준비만큼 이것저것 많은 준비를 하는 건 아니지만 봄 준비도 제법 해야 할 것이 많다. 겨울에는 사람도 쉬고, 외양간의 소도 쉬고, 헛간에 들여놓은 농기구들도 쉰다. 눈이 녹고 땅이 녹으면 농사지을 준비를 한다. 제일 먼저 점검하는 것이 겨우내 들여놓았던 농기구의 성능을 검사한다. 쟁기와 보습도 다시 챙기고, 사람과 함께 쟁기를 끌 소의 건강 상태도 살피고 한 해 농사지을 논의 논둑도 물이 새지 않게 고치고 둘러본다.
거기에 비해 여름은 따로 요란하게 준비할 게 없었다. 포근하던 날이 덥기 시작하면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훌훌 벗어던지면 된다. 껴입는 것이 준비지, 벗어던지는 건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의 여름살이 준비가 필요했다. 서늘한 베옷과 모시옷 준비를 하고, 삼베로 만든 여름 홑이불도 준비했다. 그리고 여름살이 준비에 빠지지 않는 게 부채였다. 옛어른들은 부채를 단오 전에 준비해서 단옷날에 벗들과 아랫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가을 준비는 무엇이 있을까. 들에 자라는 곡식과 과실을 수확할 준비를 한다. 곡식을 담을 가마니와 자루는 충분한지, 밤을 털 장대와 감나무 가지를 하나하나 집어 비틀어 꺾어서 따는 감 장대 준비도 미리 따로 해놓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 조상님 만날 준비로 봄과 여름에 무성하게 풀이 자른 산소마다 돌아다니며 벌초를 한다. 대개는 추석보다 보름 앞선 음력 팔월 초하룻날 벌초를 했다. 이때 벌초를 하고 추석날 산소에 가보면 깎아낸 풀 위에 아기 머리카락 자라듯 봄풀보다 연한 풀이 손가락 한두 마디쯤 자라 있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가을에 묘제를 지낼 때 읽는 축문 중에 첨소봉영(瞻掃封塋)이라는 구절이 있다. 산소를 깨끗하게 단장한다는 뜻이다.
올해 여름은 참 더웠다. 구월이 되어도 낮으로는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계절은 돌아와 계절을 이겨낼 추위도 없고 계절을 거스르는 더위도 없다. 고향의 형님이 전화해서 이번 주말에 벌초를 하자고 하신다. 그러면서 형제들 카톡방에 올해도 어김없이 매년 이때쯤 발갛게 익어 떨어지는 이른 알밤 사진을 올렸다.
어린 시절 집에는 수십 그루의 밤나무가 있었다. 우리는 가을이 오면 어머니 아버지가 새벽같이 깨워 밤나무가 있는 산에 가서 밤을 주워오게 했다. 어릴 때는 산에 밤을 주우러 가는 게 참 싫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슬은 여전해서 밤나무 밑을 한바퀴 돌고 오면 바짓가랑이가 다 젖고 밤을 줍느라 소매가 다 젖었다. 그래서 밤이 귀한 줄도 모르고 자랐다. 우리에게 밤은 어린 날 새벽 노동과 같았다.
할아버지가 어릴 때 심은 나무였다. 나무마다 똑같은 밤이 열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무마다 밤이 다 달랐다. 우리 형제끼리는 밤을 보면 그것이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것인지 알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추억을 주었던 나무들은 너무 늙어 모두 스스로 쓰러지거나 베어졌다.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들이 채워졌다.
달력을 보니 올해는 한가위 명절이 9월 한중간에 딱 맞게 자리를 잡고 있다. 주말에 내려가 벌초를 하면 가을이 더 가까이 올 듯하다. 어릴 때 줍기 싫어했던 밤도 한 바구니 주워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