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개 유령법인 명의 602개 계좌 만들어
범죄 이용 목적으로 계좌를 개설하면서 계좌개설 신청서에 허위사실을 기재했더라도 금융기관이 이를 제대로 심사하지 않았다면 그 행위를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업무방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 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 판결 중 피고인 부분을 파기 환송했다”고 23일 밝혔다.
A 씨는 명의만 빌린 이른바 ‘바지 사장’을 한 패션기업 대표이사로 선임하는 법인 변경등기를 마치고, 시중은행 지점에서 법인명의 계좌를 개설했다. 이후 금융기관들로부터 35개 유령법인 명의의 602개 계좌를 개설해 피해 금융기관들의 계좌개설 업무를 방해했다는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에서는 금융기관 계좌개설 업무담당자들이 자격요건과 사실 확인 등을 충분히 심사하고 판단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제출된 서류들이 진본인지를 원본 대조를 통해 심사하는 업무는 은행 본연의 기능이어서 계좌개설 신청서에 기재된 내용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리는 책임은 계좌개설 실무자가 지기 때문이다. 만약 은행에서 진위 여부를 가리는 심사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업무방해죄는 성립하기 힘들다.
1심과 2심은 A 씨에게 업무방해 유죄를 인정했다. 은행 업무를 방해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법원은 “업무 담당자가 피고인 등에게 금융거래 목적이나 기타 사실관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제출을 요구했는지 등에 대해 필요한 심리가 진행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법원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 업무방해 부분을 직권으로 파기했다. 다만 대법원은 “원심이 업무방해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서 하나의 형을 정하였으므로, 전부 파기한다”고 설명했다.
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