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서울 중구에 있는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소설 '문신' 완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윤흥길 작가는 집필 계기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윤 작가는 "큰 작품이라고 해서 처음엔 '토지' 같은 대하소설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거창하게 계획을 세웠다"라며 "근데 참 쓰기가 힘들어서 박경리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큰 작품이란 '인간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통찰력으로 진실을 바라보는 작품'이라고 하셔서 마음이 놓였다"라고 밝혔다.
망구(望九)를 넘긴 작가는 "다섯 권짜리를 차마 대하소설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중하소설'이라는 신조어로 내 작품을 부르고 있다"며 웃었다.
'문신'은 일제강점기 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비극을 마주하는 한 가족의 엇갈린 신념과 욕망을 다룬 소설이다. 윤 작가는 최명배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 자식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비극이 개인의 삶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포착한다. 집필에서 탈고까지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왜 하필 제목이 '문신'일까? 소설의 키워드는 '귀소본능(歸巢本能 : 다시 되돌아오는 성질)', '부병자자(赴兵刺字 : 시체를 식별하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사람의 등을 바늘로 찔러 글자를 새기던 풍속)', '밟아도 아리랑' 등으로 수렴한다.
윤 작가는 "귀소본능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라며 "조상들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일, 타향에서 죽으면 시신으로라도 고향 선산에 묻히는 것이 인생 최대의 소망이었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러한 귀소본능이 '문신'이라는 작품의 주제에도 닿아 있다. 징용에 나가기 전 몸에 문신을 새기는 부병자자 풍습을 통해서,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밟아도 아리랑'이라는 민요를 통해서 이와 같은 면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러한 풍습을 차용했다"라고 설명했다.
윤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독특한 작법을 선보였다. 바로 조사(助詞)를 생략한 문장이 많다는 것. 말과 다른 말과의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는 조사를 생략한 이유는 판소리의 율조를 형상화하기 위해서다.
그는 "예전에는 가독성을 생각하며 작품을 썼다. 이제는 나이도 많고 앞으로 쓸 기회도 자주 없으니까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게 해보자는 마음으로 문장을 썼다"라며 "판소리의 율조를 흉내 내기 위해서 어순을 바꾸고 조사를 많이 생략했다"라고 설명했다.
판소리는 우리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다는 특징이 있다. 윤 작가는 "내 소설에서도 해학적인 인물들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라며 "해학적인 문장으로 인물의 행동을 다루다 보니까 분노를 촉발하는 게 아니라 웃음을 유발한다. 못된 인간들이지만 어쩐지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이유는 해학의 효과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간담회 끝에 윤 작가는 '문학의 패션화'를 경계하며 문학의 다양성을 강조했다. 윤 작가는 "어느 날 보니 길거리에 모든 사람이 새까만 복장을 하고 있더라. 물어보니 그게 유행이라더라. 만약에 문학적 경향이 한여름의 검정 옷 일색이라면 이건 한 나라의 불행"이라고 지적했다.
윤 작가는 "어떤 대세를 이루는 흐름이 한 나라의 문학 풍토를 석권하고 있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며 "각양각색의 문학이 골고루 많이 나올 때, 바로 그 나라의 문화 풍토가 풍요하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윤 작가는 소설 쓰기의 원동력으로 '체력'을 꼽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한자리에 앉아 장시간 버티면서 소설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체력"이라며 "후배들에게 열심히 운동해서 체력을 많이 길러야 소설에서 뚝심이 솟아난다고 조언한다"라고 전했다.
끝으로 윤 작가는 "올해 82살이 됐다. 앞으로 써야 할 장편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라며 "그 소설이 나와서 또 '필생의 역작'이라고 하면 꼴이 참 우스꽝스러워진다"라면서도 "지금까지 쓴 작품에 한해서는 '문신'이 필생의 역작이라 자부한다"라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