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환자들과 의료진이 환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을 촉구하고 나섰다. 뇌전증 환자들은 잦은 발작으로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고,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학업과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정부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뇌전증협회와 대한뇌전증학회는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세계뇌전증의날 기념식 및 토론회’를 열고, 국내 뇌전증 환자들의 고충과 정부의 지원에 대해 의논했다.
세계뇌전증의날은 2015년 세계뇌전증협회(IBE)와 세계뇌전증퇴치연맹(ILAE)에서 뇌전증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알리고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로 매년 2월 두 번째 월요일이다.
한국뇌전증협회에 따르면 국내에는 약 37만 명의 뇌전증 환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중 법적으로 지원을 받는 환자는 장애인으로 등록된 약 7000명에 불과하다. 약물로 증상이 조절되지 않는 중증 환자들만 정부의 도움을 받는 셈이다.
약물로 발작을 조절할 수 있는 환자들도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취업, 교육, 대인관계 등 기본적인 사회생활에 많은 차별을 받기 때문이다. 뇌전증은 당뇨, 고혈압과 유사한 만성 질환이지만 차별로 인한 심리적 고충도 크다.
뇌전증은 치매, 뇌졸중과 함께 ‘3대 신경계 질환’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들 질환 중 유일하게 관련 지원법이 없어 환자들의 권익을 보호할 법적 수단이 부족한 실정이다.
김홍동 한국뇌전증협회 회장(강북삼성병원 소아청소년과·성균관의대 석좌교수)은 “지금까지 국내 뇌전증 환자 지원 체계는 시민단체와 학회 등 민간단체의 봉사에 의존해 왔다”라며 “국내 뇌전증 환자가 적지 않은데, 정부의 관심 밖으로 철저히 소외돼 있다”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는 ‘뇌전증 관리 및 뇌전증 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뇌전증 관리·지원법)’이 발의됐다. 2020년에 발의됐지만, 진척이 없어 아직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해당 법안은 뇌전증 예방, 진료, 연구와 뇌전증 환자에 대한 지원 등에 관한 정책을 수립·시행할 법적 근거를 담고 있다. 뇌전증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뇌전증 환자의 인권 보호, 재활, 자립을 실현할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허경 대한뇌전증협회 이사장(세브란스병원 신경과 교수)은 “뇌전증 환자들은 직장에서 발작이 일어나 해고되거나, 근무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소견서를 받아오라는 요청을 받는다”라며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두려워 복용 중인 뇌전증 치료제를 무리하게 끊고자 했던 환자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 낙인 때문에 우울증이나 불안 등 정신적인 고통을 함께 겪는 환자들이 상당수”라며 “뇌전증 환자들을 지원할 법률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IBE는 한국의 뇌전증 환자 지원 체계에 개선이 필요하다며 뇌전증 관리·지원법을 신속히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소피아 국제뇌전증협회(IBE) 회장은 영상을 통해 “정확한 정보의 부재와 편견이 직장, 학교, 지역사회 등에서 뇌전증 환자에 대한 차별로 이어진다”라며 “사회적 편견이 지속되면 정책 결정자들은 뇌전증 환자 지원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라고 우려했다. 이어 “전 세계 뇌전증 환자의 치료 격차를 줄이고 공중 보건 접근 방식을 강화하기 위해 뇌전증 관리 지원법률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