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기증자가 고려한 ‘비과세’ 순서 존중해야”…파기환송
오뚜기 창업주 고(故) 함태호 명예회장이 공익법인에 출연하는 형태로 주식을 기부한 데 과세당국이 증여세를 부과한 조치가 적법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기부라는 출연자의 좋은 뜻에도 기부 받은 단체에 대한 증여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므로 증여세는 내야한다는 취지다.
다만 대법원은 복수의 공익법인이 ‘같은 주식’을 ‘같은 날’ 기증받았더라도, 각각의 증여 사이에 시간적 선후관계가 확인된다면 비과세 순서를 고려한 출연자의 뜻에 따라 증여세 면제 기준을 서로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며 이를 고려하지 않은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남서울은혜교회와 밀알미술관이 국세청을 상대로 낸 증여세 부과 처분 취소소송에서 국세청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법원에 따르면 함 명예회장은 2015년 11월 17일 남서울은혜교회와 밀알미술관, 밀알복지재단 등 공익법인에 오뚜기 주식 총 3만 주를 출연했다. 교회에 1만7000주(지분율 0.49%), 미술관에 3000주(0.09%), 복지재단에 1만 주(0.29%)씩이다.
옛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증세법)은 공익법인이 출연 받은 재산은 증여세 과세 가액에 산입하지 않지만, 내국 법인의 의결권 있는 주식이나 출자 지분을 받았다면 해당 법인 발행 주식 총수의 5%까지만 증여세가 면제된다고 규정했다.
함 명예회장은 이들 단체에 주식을 기증하기 전인 1996년 이미 재단법인 오뚜기함태호재단에 17만 주(4.94%)를 증여한 상태였으므로, 2015년 이들 단체가 받은 오뚜기 주식을 더하면 과세 면제 기준인 5%를 넘어서게 됐다.
이에 세 단체는 주식 2만8000주에 관해 증여세를 자진 신고했다. 다만 밀알미술관 몫 가운데 2000주(0.06%)는 증여세 납부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하지만 국세청의 입장은 달랐다. ‘출연재산 운용소득 80% 이상 공익 목적 사용’ 등 상증세법 요건을 충족한 ‘성실공익법인’ 밀알복지재단엔 별도의 기준을 적용해 증여세를 취소했고, 증여세 자진 신고에서 빠진 밀알미술관 몫의 나머지 2000주까지 과세 대상에 넣어야 한다고 통보했다.
납부 비율 조정을 거쳐 증여세 73억여 원과 13억여 원을 각각 내게 된 남서울은혜교회와 밀알미술관은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국세청의 다른 조치에는 문제가 없지만 밀알미술관에 추가 증여세를 부과한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는 결론을 내놨다.
여러 공익법인이 같은 날, 같은 주식을 출연 받았더라도 그 출연에 시간적 선후관계가 있다면 ‘각각의 출연 시점’을 기준으로 증여세를 물려야지 모든 법인이 동시에 주식을 받았다고 보고 과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함 명예회장이 증여 전에 세 단체와의 합의로 ‘미술관→교회→복지재단’ 순으로 주식을 출연했다는 밀알미술관 측의 주장에 주목했다. 증여된 주식은 장애인의 미술 활동을 돕는 밀알미술관 시설 현대화에 사용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출연자가 증여세 과세 불산입 한도 등을 고려해 주식을 순차로 출연했음에도 출연이 같은 날 이뤄졌다는 이유만으로 출연자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각 주식이 동시에 출연된 것으로 의제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다”며 “원심(2심)은 시간적 선후관계 등에 관해 심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