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착된 모습 벗어나 '강인함'으로
처음 본 차가 풍기는 쌍용차 아우라
“쌍용차 토레스는 제가 디자인한 게 아니라 우리가 한 것입니다.”
쌍용차 익스테리어 디자인을 책임지는, 신차 토레스를 그려낸 문일한 팀장은 1일 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쌍용차 토레스는 성공작이다. 매달 4000대 넘게 만들어내고 있으나 출고 대기 물량만 6만 대가 넘는다. “디자인 하나가 자동차 회사의 흥망성쇠를 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사례이기도 하다.
토레스 성공의 비결 가운데 단연 멋들어진 ‘디자인’이 꼽힌다. 진짜 토레스를 그려낸 주역 중 익스테리어 디자인을 책임진 문 팀장을 비롯해 쌍용차 디자이너들을 경기도 평택 쌍용차 디자인센터에서 직접 만났다.
문 팀장의 첫인상은 시원스러운 헤어스타일, 안경 너머로 드러난 매서운 눈빛, 꽉 다문 입술은 좀처럼 범접하기 어려운 자동차 디자이너의 아우라를 물씬 풍긴다.
그런데 난데없이 “저는 ‘코란도’를 디자인하기 위해서 쌍용차에 들어왔습니다”는 문 팀장의 한 마디에 그에 대한 ‘왕고집’이라는 기자의 편견을 한순간에 없앴다. ‘코란도’는 모든 사내에게 무시할 수 없는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디자인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작 자동차 회사에서 차를 그려내기 시작한 것은 올해로 15년째다. 그는 애초 디자인으로 이름난 명문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거치며 디자인을 전공했다. 최종 목표는 공부를 계속해 강단에 서는 것이었다.
2008년, 느지막하게 쌍용차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차가 코란도였고, 당시에도(지금도 마찬가지다) 구형 코란도를 소유했었다. 막연하게 ‘내가 코란도를 디자인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마음이 솟구쳤고, 주변의 권유로 쌍용차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냈다.
쌍용차 디자인실은 워낙 규모가 작다. 디자인센터의 조직과 규모, 팀 체제를 에둘러 “극비사항”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특정 인원(디자이너 포함)이 특정 차종의 개발에 투입됐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문 팀장은 이것을 두고 “공동 책임”이라고 말했다.
“쌍용차에서는 누구도 어떤 프로젝트를 주도했다는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시장에서 실패한 차, 성공한 차 모두 우리 전체가 책임을 느끼기도 하고 성공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해요.”
신차 토레스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문 팀장은 토레스의 시작을 ‘백지’라고 표현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했다는 의미다.
“처음에는 코란도(C-300) 롱버젼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 들어 쌍용차 이미지가 굳어졌고, 이를 벗어나는 데 주력하려고 했어요.”
해외에 디자인 용역을 맡겨 완성작까지 나왔었다. 그러나 이를 과감하게 폐기했다. 쌍용차의 도전적인 이미지를 우리가 직접 디자인해야 한다는 주장을 디자인센터가 내놨고, 경영진이 이를 수용했다. 신차 J-100의 모든 디자인이 완성됐던 시점이었다.
완성작을 걷어내고 갖가지 편견을 참아가며 처음부터, 즉 백지에서 다시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혀 다른 J-100의 디자인이 나왔고 결과물(토레스)은 꽤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토레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회사에 새로운 디자인 책임자가 합류했다. 디자인센터장인 ‘이강’ 상무였다. 그는 디자이너들에게 ‘toughness(강인함)’라는 디자인 철학을 처음 던졌다.
한 마디로 “내가 책임질 테니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봐라”라는 의미였다.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이보다 더 좋은 동기부여는 없다.
디자이너 대부분은 마음속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디쯤 나만의 디자인을 숨기고 산다. 다만 이러한 ‘끼’를 애써 감추고 살아야 하는, 시장에서 잘 팔리는 차를 디자인해야 한다는 숙명도 함께 안고 있다. 새로 합류한 디자인센터장은 디자이너들에게 과감함을 주문했고 이는 주효했다.
문 팀장은 그 무렵을 일컬어 “모든 디자이너가 커다란 자신감을 갖고,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던 디자인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한 때”라고 말했다.
“설계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여서 디자인을 수정하는 데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연구소 내 다른 팀들이 새 디자인에 크게 공감해 줬어요. 새로운 디자인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줬고 안 되면 될 때까지 해결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한 거죠. 그 뒤로는 J-100 디자인을 비롯한 전체 개발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새로운 디자인 제안이 전달된 당시에 다른 연구원들이 너무 고생이 많았어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토레스는 이제 막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신차다. 그런데도 언젠가, 어디쯤에서 봤을 법한 과감함이 묻어난다. 앞뒤에 쌍용차 고유의 엠블럼을 달지 않았음에도 단박에 쌍용차임을 알아챌 수 있다. 왜 그럴까.
“정통 SUV에 대한 ‘감성의 소구’이지요.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한 비포장도로나 오프로드 코스라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은 정통 SUV만의 특징을 많은 부분에서 ‘오마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토레스가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본 차를 단박에 “쌍용차네”라고 말할 수 있는 배경에는 ‘터프니스’라는 디자인 철학도 존재한다.
이를 실현한 주인공은 엄현수 UX 디자인 팀장이다. 그는 이를 두고 “진정한 강건함”이라고 표현했다.
“쌍용차의 시작과 현재를 관통하는 중요한 브랜드 유산(Heritage)이 ‘강건함’입니다. 쌍용차 임직원이 우리 브랜드를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해요. 많은 소비자가 쌍용차에 거는 기대이기도 합니다. 이게 우리만의 독특한 브랜드 유산이에요. 여기에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면서, 쌍용차만의 일관된 ‘강인함’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토레스를 시작으로 쌍용차를 옥죄여온 족쇄가 풀렸다. 그리고 강인함이라는 나아갈 방향성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쌍용차는 어떤 차들을 내놓게 될까
“앞으로의 자동차 시장은 근본적인 것부터 큰 변화가 예상됩니다. 각 나라의 에너지, 환경, 인구, 도시 정책을 살펴보면 예상할 수 있어요. 과거처럼 기술력을 경쟁하던 시대에서 이제 서비스를 경쟁하는 시대로 변화합니다. 그렇다 보니 럭셔리냐 퍼포먼스냐 가격경쟁력이냐 등의 기존 관점에서 디자인을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디자인과 동떨어진 이야기 같지만,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의 디자인 철학은 ‘Powered by toughness’입니다. 이것을 어떤 프로젝트에 어떻게 녹여내어야 할지 기존의 구분이 아닌 전혀 새로운 구분으로 방향을 고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