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보름도 남지 않으면서 현수막 표어를 두고 여야 간의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다. 공약보다는 후보·배우자 등의 리스크를 두고 네거티브 중심의 선거가 이어지면서 현수막을 통한 공세를 어디까지 허용하는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수막에 표기된 민감한 표현을 두고 후보간 신경전이 이어지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판단이 중요해졌다. 선관위는 지난 22일 더불어민주당이 사용 가능 여부 검토를 요청한 ‘살아 있는 소의 가죽’ 표현과 국민의힘이 요청한 ‘법카 초밥’ 표현 사용을 모두 허용하고 각 당에 이를 알린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이 요청한 ‘살아 있는 소의 가죽’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측의 무속 논란을, 국민의힘이 요청한 ‘법카 초밥’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씨의 경기도청 법인카드 유용 의혹을 각각 겨냥한 표현이다.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지난 16일 무속인 태산 이모씨가 ‘건진법사’ 전모씨가 기획했다고 지목된 한 행사에서 소가죽을 벗기고 돼지 사체를 전시하는 굿을 벌인 무속인이라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이 행사가 “불교행사처럼 보이지만 무속행사에 가까웠다”고 꼬집었다. 또한 이씨가 윤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운영하는 코바나컨텐츠가 주관한 전시회에서 축사를 했다고 밝히며 윤 후보 측 무속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에 앞서 국민의힘은 전 경기도청 비서실에서 근무한 공무원의 폭로에 따라 김혜경씨가 공무원에게 사적 심부름을 시켰으며, 식사비 등 개인 비용을 경기도 법인카드로 결제했다고 폭로했다. 또한 김씨를 직권남용, 국고 손실 등의 혐의로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지난 9일 자신을 둘러싼 의혹들에 대해 사과했지만 사과 하루 뒤 법인카드 사적 유용 폭로가 또 이어지며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처럼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 및 배우자들을 둘러싼 의혹들이 해소되지 않으며 현수막을 통한 홍보에 강도 높은 비판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선관위는 이미 지난해 10월 ‘공직선거법 제90조’를 기준으로 현수막 게시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선관위는 ‘일반 선거인의 입장에서 특정 정당·후보자의 명칭·성명이 인식되고 표현 내용이 특정 정당·후보자를 직접적·명시적으로 지지 또는 반대하는 경우 공직선거법 제90조에 따라 제한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실명이나 사진이 첨부되지 않는 현수막은 대부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선관위는 ‘살아 있는 소의 가죽’과 ‘법카 초밥’의 사용을 모두 허용했다.
앞서 같은 기준에 따라 선관위는 지난 18일 ‘청와대를 굿당으로 만들 순 없습니다’라는 표현의 현수막을 두고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특정 후보 또는 후보의 배우자, 정당의 이름이나 사진이 들어간 경우에는 사용을 제한했다. 반대로 단순히 이 문구만 들어간 현수막은 이에 영향 받는 후보를 특정할 수 없다고 판단, 사용 가능하다고 밝혔다.
또한 지난 19일 “이재명 경기지사 대장동 게이트 진상조사 촉구-화천대유는 누구 겁니까?” 또는 “무당 공화국, 신천지 나라, 검사 정부 반대합니다”란 문구가 쓰인 현수막은 일반인이 게시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선관위는 보도자료를 통해 정당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위 문구가 쓰인 현수막을 공식 선거운동 중에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특정 후보의 이름이 명시되거나 후보를 특정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선관위의 기준이 편파적이라고 반발했다. 이날 선관위는 보도자료에서 ‘신천지 비호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술과 주술에 빠진 대통령 원하십니까?’라는 표어는 허용했다. 후보자 특정이 안 돼 공직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선관위 담당 상임위원회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위원들은 21일 성명을 내고 “공직 선거를 공정하고 엄중하게 관리해야 할 중앙선관위가 이번 대선에서도 정치 편향적 행태를 다시 드러내고 있다”며 “심판이 선수로 뛰고 있는 것인가, 선수가 심판으로 뛰고 있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선관위 역시 난처한 입장이다. 선관위는 지난해 “‘공직선거법 제 90조’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판단 하에, 해당 규정을 폐지하거나 규제를 완화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의견을 세 차례(2013, 2016, 2021년)에 걸쳐 국회에 제출하는 등 법 개정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나 입법에 반영되지 못했다. 사회변화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공직선거법 제90조가 국회 차원의 논의를 통해 조속히 개정되기를 희망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현수막 표어 사용을 제한하는 기준인 해당 법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따른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은 이번 대선에서 표어 사용 제한 기준이 완화되기는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