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던 법원이 2차 소송에서는 정반대 판결을 내리면서 한일관계 개선을 원하는 우리정부가 외교적 부담을 일부 덜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유사한 사안에 대해 엇갈리는 판결이 나옴에 따라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상급 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외교적 해결책 내놓기 어려운 입장이 됐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민성철 부장판사)는 21일 오전 고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다른 나라의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의미하는 '국가면제'를 적용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 손을 들어줬다. 이는 1월 “반인도적 범죄행위에는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은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같은 취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 정부가 피해자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었다. 이 판결에 일본 정부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한일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면서 이 판결에 대해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번 2차 판결은 한국정부의 외교적 부담을 다소 완화해줄 것으로 예상된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일관계에 숨통을 터줄 실마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인 일본 정부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사실상 유예될 가능성이 커졌다.
외교가에서는 1월 1차 판결 이후 정부가 밝힌 입장이 이번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당시 외교부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정부는 2015년 12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이뤄진 위안부 합의는 “양국 간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일본 정부가 내세우는 ‘최종 해결’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결국 이번 판결은 한일 갈등을 어떻게든 봉합하기를 원하는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준 셈이 됐을 수 있다는 평가다.
반면 상반되는 판결이 나와 당혹스러운 분위기도 감지된다. 위안부 문제 관한 법원의 판단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일본을 상대할 논리를 마련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이날 법원이 각하 판결을 하면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했다는 점이 더욱 입장 정리를 어렵게 할 것으로 평가된다. 재판부는 “2015년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도 이들이 겪어야했던 고통에 비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로 보기 어렵다”면서 "법원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책임은 존재하나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번 판결로 우리 정부의 셈법은 더욱 복잡해질 수 밖에 없게 됐다. 대법원 등 상급 법원의 최종 판단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어서다. 정부가 사법부의 판단에 개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판결까지 엇갈리면서 위안부 문제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