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과 자율주행차 협의 중단을 결정한 현대차그룹에는 내부적으로 그동안 복잡한 셈법이 존재해 왔다.
그동안 말을 아꼈던 그룹 관계자들이 사실상 ‘협의 중단’이 공식화된 8일부터 적극적으로 입장 표명에 나선 것도 이런 이유다.
1월 초 알려진 현대차그룹과 애플의 '자율주행 전기차 분야 협력' 소식은 글로벌 자동차 산업 전반에 걸쳐 ‘빅뉴스’였다.
그만큼 협의 과정이 신중했고 그룹 내부적으로 공식입장을 내는데 신중을 기했다. 공시를 제외하면 별다른 입장표명이 없었고, 내부 관계자의 전언 역시 사실상 전무했다.
협상 초기만 해도 애플과의 협력은 현대차그룹으로서 커다란 호재로 분석됐다.
단순하게 시가총액만 따져도 현대차(약 51조)와 기아(35.5조), 현대모비스(약 31조) 등 3사 총액은 110조 원 수준. 반면 2500조 원에 달하는 애플의 시가총액은 미국 나스닥 기준 1위였다.
애플의 투자 여력이 충분하고 브랜드 가치 역시 현대차보다 앞서 있다는데 이견도 없었다.
덕분에 19만1000원 수준이었던 현대차 주가는 1월 초 애플과 자율주행 전기차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급등세를 시작했다. 한 달 사이 현대차 주가는 25% 넘게 올라 25만 원 수준까지 치솟았다.
표면적으로 손해 볼 일이 없었던 애플과 협의가 막바지에 중단된 이유는 현대차그룹에 ‘미래차 주도권’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향후 투자 여력이나 시가총액을 비교해도 애플과의 협력은 손해 볼 일이 없다”라면서도 “그래서 자칫 주도권을 빼앗기거나 생산 대행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회사 안팎에서 나왔고, 회의론도 이때부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과 협업이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부정적 이유가 된 셈이다. 현대차그룹의 이런 결정은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애플과 협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술적 이익 역시 제한적이라는 내부 분석에도 시간이 갈수록 무게가 실렸다.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 미국 '앱티브'와 합작사(모셔널)를 설립해 실증 작업을 진행 중인 단계다.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미국 네바다에서 자율주행 4~5레벨 실효성을 동시에 검증 중이다.
인공지능(AI) 분야 역시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한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수를 통해 단박에 선두권에 올라서 있다. 여기에 첫 번째 전기차 플랫폼 E-GMP 개발을 이미 마쳤고, 곧 양산차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이미 미래차 기술력을 충분히 확보한 현대차그룹이 자칫 애플의 하청 업체로 전락하며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도 이 시점에서 나왔다.
특히 애플과 협업을 통해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던 자율주행차 기술 역시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금융투자업계 안팎에서 나왔다.
자율주행기술은 빅데이터가 관건이다. 이 경우 IT 기업보다 자동차 기업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구글의 자율주행 자회사 웨이모가 8년 동안 모아온 자율주행 빅데이터보다 전기차 기업 테슬라가 1~2년 사이에 쌓아 올린 빅데이터가 훨씬 많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자동차 기업은 이미 시장에 팔린 레벨2~3 수준의 양산차에서 실차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 IT 기업은 자체적인 실차 운행을 통해야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결국, 빅데이터가 관건인 자율주행차 개발 과정에서 자동차 기업이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연산 50만 대 수준을 판매하는 테슬라보다 700만 대 넘게 팔고 있는 현대차ㆍ기아가 쌓을 수 있는 데이터가 조만간 더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애플과 협의를 중단한 현대차그룹은 향후 미래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주도권을 선점하는 한편, 독자 노선을 더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럼에도 전기차 분야에서는 애플과 협력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다.
현대차와 기아는 공시를 통해 “애플과 자율주행차 개발에 협의하지 않고 있다”라고 밝혔을 뿐, 전기차 분야의 협의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전기차 플랫폼인 'E-GMP의 경쟁사 공급' 가능성을 공언했던 만큼, 애플에 전기차 플랫폼을 제공할 여지는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