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가 27년 전 인수한 미국 자회사 ‘제니스’를 신사업 거점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수 이후 한동안 부진한 실적으로 ‘실패한 인수ㆍ합병(M&A)'으로도 평가됐지만,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연구개발 법인으로 거듭난 이후 LG전자와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제니스(Zenith Electronics LLC)는 지난해 4월 미국 특허청(USPTO)에 '알루토(Alluto)'라는 이름의 상표권을 출원했다. 알루토는 이달 27일 출범하는 스위스 인포테인먼트 기업 룩소프트(Luxoft)와의 합작법인이다.
이 점을 들어 업계에선 알루토 설립과 운영, 인재 확보 과정에서 제니스가 일정 부분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제니스가 별도 사업을 위한 법인명을 상표권으로 출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이달 7일 LG전자가 발표한 TV 광고ㆍ콘텐츠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 ‘알폰소(Alphonso Inc.)’지분 인수 구조에도 제니스가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LG전자는 약 8000만 달러(약 870억 원)를 들여 알폰소의 지분 50% 이상을 확보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회사인 제니스를 끼고 투자를 단행했다.
LG전자 관계자는 “알폰소 지분 인수 구조에 제니스가 포함된 게 맞는다”라며 “제니스는 북미 지역에서 여러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는 법인”이라고 설명했다.
LG전자는 1995년 5억5000만 달러를 들여 당시 미국 전자제품 제조 및 개발 업체였던 제니스를 인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니스를 활용해 현지 TV 사업망과 제조 거점을 확대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정작 인수 이후 부진한 실적과 늘어가는 적자 폭에 ‘미운 오리 새끼’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얻었다.
결국, 1998년 외환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LG전자는 제니스의 기업회생계획을 미국 법원에 신청하며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섰다.
구조조정의 방향은 연구ㆍ개발(R&D) 기능 강화였다. 이를 위해 일리노이주, 멕시코에 있던 공장 5곳을 줄줄이 매각했다. 비싼 돈을 들여 인수한 기업의 제조 부문을 과감하게 쳐낸 것이다. 자산 평가손실 분과 비용 등을 모두 합치면 인수 비용의 두 배 수준인 10억 달러에 달했다. 제니스가 보유 중이던 미국 디지털방송 원천기술 VSB(Vestigial Side Band)의 가치를 높이 산 데 따른 결정이었다.
분위기가 바뀐 건 2000년대 중반부터다. 세계 디지털 TV 시장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VSB 기술을 갖고 있는 제니스는 쏠쏠한 특허료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제니스는 2005년 긴 적자에서 탈출한 이후 제조시설 없이 지금까지 수백억 원 수준의 순이익을 내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엔 북미 R&D 거점 기능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본래 사업영역과 밀접한 스마트TV 기술부터 시작해 스마트홈, 스마트카까지 영역도 넓어지는 양상이다.
실제로 제니스가 USPTO에 낸 상표권을 살펴보면, 엔요(Enyo), 커넥트 SDK 등 웹OS 관련 소프트웨어와 관련돼 있다. LG전자는 2013년 HP로부터 웹OS를 인수한 이후 스마트 TV, 스마트 가전부터 전장 인포테인먼트까지 탑재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또한, 2018년 캐나다 토론토에 인공지능(AI)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면서, LG전자는 토론토 AI랩 인재 채용 과정을 제니스에 맡기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설립 예정인 알루토의 경우 전장용 소프트웨어를 주로 개발할 것으로 보이고, 알폰소 역시 데이터 분석 등 소프트웨어 위주 기업”이라며 “웹OS 등 SW 개발을 위주로 해온 자회사와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