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하기 전에 국내 법체계와의 정합성,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먼저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6일 법무부에 집단소송법 제정안과 상법 개정안에 대한 경제계 의견서를 전달했다고 8일 밝혔다.
상의는 대륙법 체계를 따르는 현행 법제에 영미법 제도인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전면도입하면 법체계 간 충돌이 예상되기 때문에, 사전에 입법영향평가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상의는 첫째로 집단소송법안이 미국 집단소송제를 모델로 하면서, 미국에는 없는 원고 측 입증책임 경감을 추가했다며, 이는 민사소송의 입증책임 분배 원리에 맞지 않고 세계적 유례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입증책임 경감은 환경오염피해구제법, 제조물 책임법처럼 정보 비대칭성이 큰 특수 사안에 도입되는 데 민사상 모든 손해배상책임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소송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에는 집단소송에 있어 원고의 입증책임을 낮추는 규정이 없고, 미국 법원은 집단소송도 개별소송과 같게 원고가 입증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둘째로, 집단소송법안이 특허법상 자료제출명령제도를 차용해 일반 손해배상에서도 기업 영업비밀을 예외 없이 제출토록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영업비밀은 기술유출 방지 등 각종 법률로 보호되는 기업의 핵심자산으로 민사소송법의 문서 제출명령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제출을 거부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반면 특허법의 자료 제출명령은 특허침해소송 등 특수 사안에 한해 영업비밀 제출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일반 손해배상책임을 다투는 집단소송에 적용할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셋째로, 상의는 남소방지장치 삭제 등 소송요건 완화로 인한 부작용도 우려했다. 집단소송법안은 현행 증권집단소송법의 ‘3년간 3건 이상 관여자 배제’ 조항을 삭제했고, 소송허가 요건도 미국보다 완화했다.
미국에서는 ‘인공감미료가 부작용을 유발한다’라는 미검증 연구결과를 근거로 코카콜라에 대해 집단소송이 제기되는 등 집단소송 건수가 174건(2010년)→217건(2015년)→428건(2019년)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대한상의는 미국 사례를 참고해 적절한 남소방지대책을 선행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넷째로, 집단소송에 국민 참여 재판을 도입하는 것 역시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집단소송은 사법적 법률관계를 다투는 민사소송 절차로서 복잡한 쟁점이나 손해액 산정 등에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배심제도가 있는 미국도 민사재판에서는 배심제가 거의 활용되지 않아 사실상 소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국민참여재판법과 달리 규정하고 있는 문제도 지적했다. 국민참여재판법은 중범죄 사건만 대상으로 하고 공동피고 일부가 원하지 않으면 배제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는데, 집단소송법안은 모든 1심 사건에 적용하고 피고 측의 기피신청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이밖에 집단소송법안은 소급적용을 허용해 법 시행 이전에 생긴 사유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도 집단소송을 허용하고 있는데, 피고의 배상범위 등 권리 의무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헌법상 소급입법금지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상의는 징벌적 배상제를 전면도입하는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법체계 정합성, 해외 사례 등을 신중하게 검토할 것을 건의했다.
전통적으로 대륙법계 국가는 민ㆍ형사책임을 구분해 손해배상은 실제 손해액을 배상하고 형벌과 과징금 등의 행정벌을 따로 부과한다. 반면, 영미법계 국가는 실손해액을 넘는 징벌적 배상을 통해 사적 배상 외에 공적 처벌 기능도 수행한다.
상의는 대륙법 체계에 영미법 체계를 단순 접목하면 ‘모든 경제활동 주체들에게 과잉처벌위험’을 유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징벌적 배상제를 개별법에 부분 도입하는 차원을 넘어 일반법인 상법에 전면 도입하는 것은 형사제재, 행정제재 등 사전규제에 대한 전반적인 조정방안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영석 대한상의 기업정책팀장은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고 기업의 책임경영을 높일 필요성에 대해서는 기업들도 공감하고 있다”라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택 가능한 다양한 대안을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며,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경제 주체들의 공감성ㆍ수용성 및 제도의 실효성이 충족될 수 있도록 입법영향평가를 비롯한 충분한 연구ㆍ논의가 선행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