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학부총장에게 ‘코로나 시대, 카이스트의 역할’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카이스트는 새로운 문제를 발굴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남들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데 급급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문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이 교수는 그 답을 인간에게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서 새로운 질문을 찾아야 한다”며 “카이스트가 엔지니어링만 해서는 일류가 못 되는 이유”라고 단언했다.
최근 ‘포스트 AI’ 연구팀을 만든 그가 첫 연구 모임에서 ‘인간 본성의 법칙’ 일독을 과제로 낸 것도 그 연장선이다.
이 교수는 10년 뒤 인공지능(AI)이 일상이 된 시대에 새롭게 추구할 기술을 준비하기 위해 포스트 AI 연구팀을 만들었다. 학교 안에서 이 교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모아 팀을 꾸렸고, 인터뷰 전날인 지난달 15일 첫 모임을 열었다.
그는 “33명이 처음 모인 자리에서 로버트 그린이 쓴 ‘인간 본성의 법칙’을 나눠 주고, 다음 시간까지 다 읽고 오라는 과제를 냈다”며 “10년 뒤 뭘 할지 알려면 인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당장 5년 뒤 산업 구조의 무게 중심이 바이오로 옮겨갈 것으로 전망했다. 전 세계적으로 바이오 시장 규모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보다 2배 이상 크다. 그런데도 한국이 전 세계 바이오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도 안 된다. 다만, 코로나가 국내 바이오산업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는 됐다.
그는 “바이오산업에 관한 관심은 어쩌면 코로나가 준 선물”이라며 “진단키트에서 성과를 달성한 것처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건생명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바이오 분야의 주무 부처는 보건복지부이지만, 복지를 신경 쓰느라 보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보건 분야를 독립시켜야 한다”며 “작은 정부를 이야기하면서 부처를 줄이려고 하지만, 할 건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보건생명부’ 외에 ‘지식재산처’, ‘식약진흥처’ 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식재산처는 다음 정권 인수위에서부터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중소기업 현장에서 비일비재한 기술 탈취 문제 때문이다. 지식재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특허법이 개정되는 등 진전은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는 판단이 나온다.
개정 특허법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타인의 특허권이나 영업비밀을 고의로 침해하면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 책임을 지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적용됐다. 올해 12월부터는 특허권자의 생산능력을 초과하는 특허침해자의 제품 판매에 대해서도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이 교수는 “법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특허를 두고 싸우면 강자가 이기는 구조”라며 “문화부가 담당하는 저작권을 떼어와서 지식재산처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식약진흥처’는 의료기기 국산화와 같은 ‘산업 진흥’의 관점이 필요해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따져 의료기기의 인증과 관리를 도맡고 있다. 안전 관리에 방점이 찍히다 보니 현장에서는 규제로 작용하는 일도 상당하다. 일례로 최근 식약처는 안면 인식 체온측정 카메라를 의료기기로 보고 의료기기 허가를 받지 않은 체온기에 대한 점검에 나섰다. 안면 인식 체온측정 카메라가 의료기기인 줄도 몰랐던 업체들은 혼란에 빠졌다. 식약처가 의료기기법 위반 혐의로 조사에 나서면서 생산을 전면 중단한 업체도 생겼다.
이 교수는 “‘식약진흥처’로 이름을 바꾸면 관리도 하고 진흥도 시켜야 한다”며 “진흥도 해야 한다고 하면, 무조건 허가가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이 부족해 인증받지 못하는지 과외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창업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정부와 사회가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공한 창업은 실패를 거름 삼아 탄생한다.
이 교수는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성공한 창업자들은 평균 2.5회 실패한다”며 “혁신적인 창업 기업이 탄생하면 사회 전반이 골고루 혜택을 받는 데, 실패하면 오로지 창업자 혼자 위험을 짊어지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볍게 창업하고, 실패하고,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디지털 전환에 대비하는 중소기업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는 AI 교육을 확대해 인력을 늘리는 게 첫 단계라고 역설했다. 중소기업 현장에서 AI 인력이 부족해 디지털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대학에 AI 인재 양성을 위한 예산을 대폭 투입해야 한다”며 “청년 실업도 줄이고, 중소기업도 살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중소벤처기업이 성장하기 위한 정책의 답은 나와 있는데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기득권에 있다고 분석했다.
창업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고 중소기업 인력을 육성하는 일, 지식재산청을 만들어 중소기업의 기술탈취를 원천 봉쇄하는 일 등 모두 기득권이 반기는 일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는 “현재 시스템을 즐기는 대기업이 기득권을 쥐고 있어 쉽게 실현되지 않는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렇지만 이 교수는 계속 이야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카이스트 내에서 지식재산대학원과 과학저널리즘대학원 설립을 주도했고,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을 만들면서 번번이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긴다”는 신조를 새겼다고 말했다. 이어 “포기하면 지는 것”이라며 “‘창업 활성화’를 만드는 데 장애물이 많지만, 계속 떠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 교수는 김정주 넥슨 창업주, 신승우 네오위즈 공동창업자 등 1세대 스타 벤처를 키워낸 벤처계의 대부다. 드라마 ‘KAIST’의 실제 모델로도 유명한 그는 국내 대표 미래 학자다. 1990년대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 시절 ‘스타 벤처의 요람’으로 이름을 알렸고, 수백억 원대 대학 기부금을 유치해 2001년 바이오 및 뇌공학과를 신설했다. 2009년에는 지식재산대학원과 과학저널리즘대학원을 설립했고, 2013년부터는 국내 최초 미래학 연구기관인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