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GT(Grand Tourer)는 존재의 당위성이 부족했다. 자동차에 GT라는 이름을 내 거는 것 자체가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GT는 이름 그대로 ‘장거리 주행’에 모자람이 없는, 넉넉한 성능과 실내공간까지 갖춘 차다. 탄탄한 주행성능은 물론, 장거리 주행에도 부담이 없는 묵직한 승차감이 필수다.
이런 GT가 인기를 누리는 곳은 미국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도로 위에서 고성능 그랜드 투어러(GT)는 스포츠카가 해내지 못하는 영역을 아우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에서 GT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만한 도로도 없었고, 자동차 산업과 문화가 그만큼 성숙하지도 않았다.
고성능 스포츠카와 대배기량 고급 사이의 날카로운 경계선에서 GT는 설 자리가 없었다.
◇2.0 터보 대신한 최고출력 304마력의 2.5 터보= 그러는 사이 GT가 하나둘 등장했다. 북미 대륙형이 아닌, 한국형 GT였다. 2017년 등장한 기아차 스팅어가 대표적이다.
엔진 배기량과 등급, 가격을 따졌을 때 스팅어는 기아차 K7과 K9 사이에 자리한다.
다만 이름 그대로 평범한 K시리즈 세단을 거부한다. 나아가 기아차 제품군 가운데 유일하게 차 이름 앞에 ‘스포츠 세단’ 나아가 GT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세련된 스타일과 넉넉한 공간 활용성, 탄탄한 서스펜션, 나아가 어디에 내놔도 모자람이 없는 고성능(최고출력 365마력) V6 3.3 트윈 터보 엔진은 한국형 GT의 방향성을 제시해 왔다.
나아가 2.0 가솔린 직분사 터보와 2.2 디젤도 부족함이 없는 성능으로 엔트리급 스팅어로 자리 잡았다.
스팅어는 후륜구동을 기본으로 네 바퀴 굴림 AWD(옵션)를 고를 수 있다. 전륜구동 일색인 기아차 제품군에서 최고봉 K9을 제외하면 유일한 후륜구동이다.
후륜구동은 50:50에 가까운 앞뒤 무게 배분이 특징이다. 엔진과 구동장치가 모조리 앞쪽에 쏠린 전륜구동과 달리, 도로의 굴곡에 따라 뒷좌석 승객이 말 타듯 출렁이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스팅어는 대부분의 후륜구동 스포츠 세단처럼 어느 도로에서나 안정감 있게 달렸다.
◇2011년 한국형 GT를 앞세워 개발 착수=스팅어의 시작은 2011년 공개된 ‘기아 GT 콘셉트’였다. 밑그림인 콘셉트카부터 GT를 염두에 뒀다는 의미다.
콘셉트카는 중형세단 K5(1세대)가 인기를 누리던 시절 등장했다. 아우디 폭스바겐 출신의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의 작품이다.
그는 기아차 사장이었던, ‘디자인 기아’를 주도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영입한 외국인 디자이너 1호였다. 이 무렵부터 기아차 디자인은 점진적으로 현대차의 그것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콘셉트카 공개 6년 만에 등장한 양산형 스팅어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KIA’ 엠블럼이 없었다.
현대차가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를 출범한 것처럼, 스포티를 강조해온 기아차는 스포츠카 브랜드 ‘스팅어’를 염두에 뒀다.
지금은 차 이름이지만 언젠가 스포츠카 브랜드 스팅어가 출범할 수 있는 셈이다.
◇기본 디자인 고수하며 엔진 변화에 초점 맞춰=데뷔 3년여 만에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으로 거듭난 스팅어는 변화의 초점을 엔진에 뒀다.
출시 당시 △직렬 4기통 2.0 가솔린 터보 △2.2 디젤 터보 △V6 3.3 트윈 터보 등 3가지였던 엔진에서 디젤을 걷어냈다.
그리고 2.0 터보 대신 2.5 터보를 새로 얹었고, 최고봉인 V6 3.3 트윈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을 365마력에서 373마력으로 소폭 끌어올렸다.
2.5 터보 엔진은 2000년대 초 등장한 현대차의 세타 엔진(NF쏘나타)이 밑그림이다. 성능과 내구성이 검증된 직렬 4기통 2.0 직분사 엔진의 배기량을 확대해 2.5로 키우고 여기에 과급기인 터보를 더한 게 새 엔진이다.
가까스로 250마력을 넘어섰던 최고출력은 단박에 304마력까지 솟구쳤다. 고성능을 상징하는 '최고출력 300마력'을 넘어서면서 이제 GT 라는 수식어 앞에 ‘고성능 GT’라는 수식어까지 누리게 됐다.
V6 3.3 트윈 터보와 최고출력 차이가 110마력에 달했던 이전(2.0 터보)과 달리 새 엔진 역시 300마력의 반열에 올라서면서 V6 3.3과의 출력 차이가 줄어들었다. 연비와 세금 측면에서 유리한 2.5 터보가 새롭게 스팅어를 대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출력은 2.5 터보가, 회전 질감은 2.0 터보가 좋아=새 모델은 부분변경 때마다 앞뒤 모습을 화끈하게 뜯어고치는 현대ㆍ기아차의 제품전략에서도 벗어났다.
더는 고쳐볼 수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디자인은 소폭의 변화만 허락했다. 오히려 이 멋진 모습을 뜯어고쳤다면 몰매를 맞았을지 모른다.
언론을 대상으로 한 시승행사 역시 변화의 초점인 2.5 터보에 집중했다.
앞모습은 헤드램프의 주간주행등의 세부 형상을 바꾼 게 유일한 변화다. 뒷모습도 이전 실루엣을 유지한 채 후미등 내부 형상에 변화를 줬다.
이탈리아 스포츠카 브랜드 ‘마세라티’를 빼닮았던 후미등은 좌우를 하나의 LED 램프로 연결해 기아차의 패밀리 룩에 합류했다.
차 길이는 아랫급 K7은 물론 중형세단 K5보다도 7.6cm가 짧다. 반대로 높이는 K5보다 4.5cm가 낮고, 너비는 무려 24cm나 넓어 한결 안정감 있다.
실내 역시 커다란 변화 없이 이전의 배치를 고수했다.
대시보드 중앙에 껑충하게 솟아올랐던 디스플레이를 걷어냈다. 그 자리에 10.25인치 가로형 모니터를 얹었다. 덕분에 이전보다 한결 안정감 있다.
출발은 꽤 경쾌하다. 다만 차고 넘치는 최고출력을 억지로 억제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밀려온다.
이전 2.0 터보 엔진은 피스톤 너비(보어)와 위ㆍ아래 이동범위(스트로크)가 각각 86.0mm로 같았다. 보어와 스트로크가 같은 이른바 '스퀘어 타입 엔진'이다.
새 엔진은 배기량을 500cc 늘리면서 스트로크를 늘렸다. 이전과 똑같은 엔진이지만 엔진 피스톤의 위아래 운동범위가 증가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엔진이 바뀌면 저속에서 육중한 힘을 낼 수 있다. 거꾸로 고회전으로 올라갈수록 기존의 2.0 터보 엔진보다 회전 질감은 오히려 떨어진다.
엔진 제원도 이런 현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과거 2.0 터보 엔진의 최고출력(255마력)은 회전수 6200rpm에서 뽑아냈다. 반면 2.5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304마력)이 상승했으나 이 출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5800rpm에서 나온다.
차고 넘치는 고성능을 맛보기 위해 굳이 경박스럽게 회전수를 끝까지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느 상황에서도 마음먹은 대로 경쾌하게 내달려= 이전보다 배기량과 최고출력이 크게 향상했음에도 앞뒤 균형은 여전히 완벽에 가깝다.
이미 V6 3.3 트윈 터보까지 견딜 만큼 균형 잡힌 서스펜션 덕에 2.5 터보 엔진 역시 빼어난 조화를 이룬다.
자동차 전용도로에 올라서면 마음먹은 대로 차를 움직일 수 있다. 빈자리가 보일 때마다 눈에 보이는 빈자리에 차를 펑펑 던져 넣을 수 있다. 차선변경→가속→추월→복귀를 반복할 때마다 모든 동작이 매끄럽고 우아하게 이어진다.
손과 발에 스팅어가 익숙해지면서 슬며시 ‘한 때쯤 갖고 싶다’라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왔다.
언급한 대로 스팅어는 기아차의 K시리즈 세단 제품군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준대형 세단 K7과 대형 플래그십 K9 사이에 존재하는 세단을 찾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시길.
고성능 GT의 매력과 가치를 충분히 아는, 그래서 스팅어의 진정한 가치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이에게 어울린다. 바로 당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