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기자가 싱가포르에서 만난 데이비드 드레지(David Dredge) 당시 ABN 암로(AMRO) 아시아 트레이딩 부문 대표(Head of Local Markets Trading, Asia)가 한 말이다. 그는 한국이 아시아 금융허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금융기관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정부 차원에서는 역차별 등 규제를 개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금융기관 차원에서는 해외 유수 금융사와의 제휴를 통해 기술 향상과 함께 국제적 영업활동 경험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자는 당시 ‘선진금융시장 릴레이 르포, 동북아 금융허브 길을 찾다’는 기획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찾았었다.
10년이 넘는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이투데이가 이번 주 ‘코로나19를 넘어 점프코리아’ 시리즈 중 하나로 ‘다시 꾸는 금융허브’를 이틀에 걸쳐 다뤘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소위 K방역으로 안전지대로 급부상한 한국이라는 프리미엄에다,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에 따라 금융허브로서 흔들리는 홍콩의 지위를 기회로 삼아 도약해 보자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현실과 전문가들의 평가는 냉혹했다. 여전히 높은 법인세와 경직된 노동시장, 불투명한 규제 등은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언어장벽도 아직 해소하지 못한 과제다. 기자가 10여 년 전 르포를 취재할 당시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점에서 되레 퇴보한 느낌마저 든다.
10여 년 전 당시만 해도 포부만큼은 컸었다. 한창 기업금융(CB)과 투자금융(IB)을 합한 기업투자금융(CIB·Commercial Investment Bank)을 우리만의 IB로 육성해 보자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7년 4월 구성됐고, 현재도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정부의 ‘금융중심지 추진위원회’를 보면 당찬 포부나 간절함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 사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실제 당시 글로벌 유수 IB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IB를 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기도 했다. 이후 우리는 탈무드에 나오는 여우의 신포도처럼 애써 IB와 금융허브의 꿈을 외면해 왔다.
또,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강화되기 시작한 바젤 규제 속에서 국내 금융산업은 급격히 규제모드로 바뀌어 갔다. 그러니 은행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계대출이나 기업대출에 목을 매는 것뿐이었다. 기업대출을 옥죄면 가계대출로, 가계대출을 옥죄면 기업대출로 갈아타기 바빴다. 금융중심지로서 우리 경쟁력이 뒷걸음질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수순인 셈이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한창이라는 점에서 금융허브는 실로 먼 꿈일 수도 있겠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최근 홍콩 사태를 계기로 삼기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에도 우리 경제는 경제의 기초체력만큼이라고 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장세를 이어왔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수출이 여전히 우리 경제의 핵심이고 중요한 것도 사실이나, 제조업만으로 경제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 것는 오래전 일이다. 부가가치 측면에서나, 고용 측면에서도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이 앞선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10여 년 전보다 더 좋은 여건도 널려 있다. 국제신용평가사들이 평가하는 국가 신용등급은 일본을 앞선 지 오래다. 외환보유액은 4100억 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치다. 2014년부터는 외국에서 빌린 돈보다 빌려준 돈이 더 많은 소위 채권국 지위에도 올랐다. 그만큼 돈을 흔들며 유수 IB들을 유혹할 수단이 생겼다는 의미다. 국내 채권시장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국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를 위한 미래 먹거리로 금융산업은 놓칠 수 없는 분야다. 취업에 목매는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부문도 바로 이곳이다. 지금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런 점에서 10여 년 전 데이비드 드레지 대표가 우리에게 했던 조언을 다시 한번 곱씹어봤으면 싶다. kimnh2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