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름이 Q야?”
‘직장 내 성 소수자’를 주제로 기사를 쓴 뒤 주된 인터뷰이로 등장한 레즈비언 ‘Q씨’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있었다. 기사에는 담지 못했는데, Q는 ‘퀴어(Queer)’의 앞글자를 딴 이름이다.
퀴어는 LGBT(레즈비언ㆍ게이ㆍ바이섹슈얼ㆍ트렌스젠더), 무성애자 등 성 소수자를 포괄하는 말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기사에 어떤 이름으로 인용되길 원하는지 묻자 그녀가 직접 이 단어를 선택했다.
취재를 하며 기자를 포함한 많은 이가 성 소수자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별로 없다는 걸 느꼈다. Q씨가 말해준 직장 내에서의 두려움, 불편함, 경제적 불이익은 이성애자가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통계나 연구 자료도 부족했다. 기사에 활용하기 위해 성 소수자에 관한 국가 차원의 통계를 찾아봐도 국가인권위원회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가 최신이었다. 실태 파악조차 더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낯선 대상에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북한 이탈주민에게 그랬고, 난민에게도 그랬다. 일단 존재를 깨닫고, 알아가기 시작하면 이해의 가능성은 커진다. 그래서 존재의 ‘가시화’가 중요하다.
머지않아 기업에서도 성 소수자 직원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대비하지 못한 변화는 기업에 ‘리스크’다. 기업이 미리 관심을 두고 사내 교육, 사규 정비 등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할 이유다.
‘인권’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우리 주위에 성 소수자가 생각보다 많고, 직장 내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Q씨가 들려준 메시지는 간단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는 것. 성 소수자는 일터에서 당신과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동료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말 못 할 고통으로 힘들어한다면,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어쩌면 Q는 당신 옆에서 일하는 동료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