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 간 사상 최대 규모의 감산 합의로 미국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감산 합의 막후에서 보여준 존재감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밀어내고 석유 카르텔의 사실상 맹주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12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10개 주요 산유국 연대체인 OPEC플러스(+)는 이날 긴급 화상회의를 열어 5월 1일부터 6월 말까지 두 달 간 하루 970만 배럴의 원유를 감산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합의된 감산량은 그동안 OPEC+가 결정한 감산·증산량 가운데 최대 규모다.
합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FT는 합의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OPEC의 감산과 유가 상승에 불만을 품고 비난을 이어왔지만, 국제유가 폭락으로 미국 셰일업계가 고사 위기에 놓이자 입장을 바꿨다. 유가 전쟁을 벌이던 사우디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 중재에 나서는 등 합의 도출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미국 상원의원들도 사우디 에너지 장관을 포함한 정부 관리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평가하겠다”고 위협에 나서며 힘을 보탰다.
또 다른 복병도 만났다. OPEC+는 지난 9일 화상회의에서 하루 1000만 배럴을 감산하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멕시코의 반대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9시간 넘게 이어진 회의에서 OPEC+는 5~6월 두 달간 하루 1000만 배럴을 감산하기로 잠정 합의했으나 멕시코가 자국에 할당된 하루 40만 배럴의 감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10만 배럴만 감산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미국이 해결사로 나섰다. 미국은 OPEC+가 멕시코에 요구한 40만 배럴 가운데 25만~30만 배럴을 메워주겠다고 자처했다. 그러나 사우디가 물러서지 않았다. 멕시코가 추가 감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10일 열린 주요 20개국(G20) 에너지 장관 회의에서도 합의가 불발됐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이 또다시 사우디를 압박했고, 결국 사우디가 멕시코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합의가 타결됐다.
RBC캐피털마켓츠의 헤리마 크로프트 전략가는 “트럼프의 개입으로 사우디가 모든 국가가 동등하게 감산해야 한다는 입장을 누그러뜨렸다”면서 “트럼프가 사실상 OPEC의 맹주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에 세계 석유 카르텔의 중심이 사우디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동안은 사우디가 OPEC의 맹주로서 상황을 주도했으나 사우디가 탈석유 경제 비전을 추진하고, 석유에 의존하던 중동 국가의 경제가 취약해지면서 구심력을 잃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셰일오일로 세계 원유시장에서 미국의 입지가 커진 것도 판세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케빈 북 클리어뷰에너지파트너스 애널리스트는 “이번 합의에서 미국이 시장 관리를 위해 세계를 움직이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면서 “OPEC+의 좌장은 사실상 트럼프”라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감산 합의 직후 트위터를 통해 “OPEC+가 합의했다. 이 합의가 미국 에너지 분야의 일자리 수십만 개를 구할 것”이라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에게 감사하고 축하한다”고 전했다.
OPEC+의 감산 합의 소식에 국제유가는 일단 강세를 보이고 있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6월물 브렌트유는 이날 오전 9시 20분 현재 전장보다 배럴당 3.1% 뛴 32.44달러에 거래됐다. 장 초반 한때 8%까지 오르기도 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장보다 배럴당 5.3% 오른 23.96달러에 거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