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유수지.약 7만4000㎡ 넓이인 이 땅은 잠실 아파트촌이 생길 때 함께 만들어졌다. 탄천이 넘치더라도 유수지에서 물을 가둬놔 아파트촌에 물난리가 나는 걸 막기 위해서다. 1990년대부턴 주차장으로도 쓰이고 있다. 지금도 주중이고 주말이고 만차 상태다.
원래대로면 지금쯤 이 자리엔 차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어야 했다. 국토교통부는 2013년 잠실유수지를 행복주택 시범지구 7곳 중 하나로 지정했다. 잠실유수지 위에 아파트를 올려 사회 초년생과 신혼부부 등을 위한 행복주택 1800가구를 공급한다는 구상이었다. 문제는 주민 반대였다. 정부가 주민과 논의 없이 행복주택 건설을 ‘깜짝 발표’한 탓에 곳곳에서 주민 반대가 거셌다.
2015년 주민 반대가 가장 심했던 서울 양천구 목동 행복주택이 백지화됐다. 다른 시범지구 중 서울 노원구 공릉동과 서대문구 가좌동, 구로구 오류동에선 예정대로 사업이 추진됐지만 잠실과 송파, 안산 고잔동에선 행복주택 사업이 흐지부지됐다. 그 후 어떤 대안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잠실유수지가 주차장 노릇을 하는 이유다. 애초 국토부 계획대로였다면 이들 3개 지역에서만 4900가구가 지어졌어야 했다. 이병훈 국토부 공공주택총괄과장은 “잠실·송파지구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공주택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재작년부터 송파구와 논의를 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풍선’ 주택 공약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충분한 사전 작업 없이 무리한 목표를 내세웠다가 주민 반대에 부딪혀 표류하는 일이 적잖다. 전문가들은 ‘일방통행식’ 정책 추진이 주택 공급에 차질을 일으킬 것으로 우려한다.
최근에도 청년과 신혼부부 등을 위한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이 휘청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공주택지구 조성이 추진되는 지역은 37곳이다. 정부 구상에 따르면 이들 지역에서 2026년까지 30만6000가구가량이 공급될 예정이다.
공공주택지구 조성을 발표할 때마다 반대가 일었다. 정부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에 반대하는 각 지역 주민이 연합해 ‘공공주택지구 전국 연대 대책 협의회(전국연대)’까지 꾸려졌다. 토지 소유자가 납득할만한 수용·보상 방식을 마련하라는 게 이들 주장이다. 임채관 전국연대 의장은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공공주택지구를 추진해놓고 헐값에 강제 수용하려 한다”며 “불가피하게 공공주택을 지어야 한다면 사전에 합리적인 수용·보상체계를 마련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반대에 공공주택지구 조성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경기 시흥시 하중동 주민들은 올 1월 공공주택지구 지정을 취소해달라고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들은 국토부가 주민과 소통 없이 부실한 환경영향평가로 공공주택지구 조성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2023년부터 3213가구를 공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국토부로선 악재다.
경기 성남시 서현동에선 공공주택지구 조성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시의원 주민소환까지 준비하고 있다. 주민 뜻에 반해 공공주택지구 조성을 막지 못했다는 게 이유다. 서현지구 개발에 반대하는 측에선 국토부 등이 교육·교통 인프라 확충 없이 공공주택만 늘리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서현지구엔 2023년까지 공공주택 2500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다. 김규철 국토부 공공주택추진단장은 “1, 2기 신도시를 조성할 땐 소통이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면서도 “이번엔 지난해만 100회 이상 간담회를 열었다. 지구 지정이 마무리되면 주민과 갈등 문제가 거의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일방적인 주택 공급을 추진하다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정권이 바뀌면 주택 공급 계획이 백지화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택 공급 취지를 주민들에게 설득하고 공공주택지구 조성으로 주민들이 입는 피해에는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