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과 밭은 농사를 짓기 위한 땅 이상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 논의 기능은 실로 방대하다. 우리나라는 연중 강우량의 60~70%가 7~9월에 편중되어 있다. 논은 이 기간에 빗물을 저장하고 홍수를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논에 고인 물은 지하로 침투되어 지하수의 공급원이 된다. 이 밖에 토양 유실 방지, 대기 정화, 생태계 보전, 경관적 가치 등을 지닌 논은 1㏊당 연간 2944톤의 홍수를 조절하고, 4143톤의 지하수 공급, 21.9톤의 이산화탄소 흡수, 15.9톤의 산소 공급 등 이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면 56조 원에 달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전체 농경지 면적의 감소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해마다 논 1만6000㏊가 사라졌다.
농촌진흥청은 논이 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논의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논에 벼 이외의 타 작물 재배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서구화된 식단과 식습관 변화로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2000년 93.6㎏에서 2017년에는 61.8㎏으로 급감했다. 또한 의무 수입물량인 41만 톤 TRQ(저율할당관세) 쌀도 매년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매년 구조적인 쌀 공급 과잉 현상이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곡물 자급률이 24% 수준에 불과한 국내 식량안보 실정상 쌀이 남는다고 무작정 논 면적을 줄일 수도 없다.
논에 밭작물을 옮겨 심기도 쉽지만은 않다. 우리나라 밭은 90% 이상이 평지가 아닌 경사지 형태로 존재한다. 많은 비가 오더라도 자연스럽게 배수가 된다. 반면 편평한 땅인 논은 상대적으로 배수가 불리하다. 현재 벼 이외 논 토양에서 잘 자라는 작물은 찾기가 어렵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물 대부분은 수분 과잉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생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름철 강수량이 많은 우리나라 기후 특성상 논에 벼 이외의 작물을 심었을 경우, 심각한 습해를 입을 가능성도 크다.
우리보다 앞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일본은 2016년 콩 재배면적 15만㏊의 80%가 논에서 재배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체 콩 재배면적의 14%(17년, 6000㏊)만 논에서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나라도 논에 밭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점차 늘어날 것이다. 밭작물을 논에서도 안심하고 심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최근 농촌진흥청에서는 논에서 밭작물 습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물관리 기술이 개발됐다. 논 토양 수분을 지하수위 조절을 통해 자동으로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논에서 벼와 밭작물을 물 문제 없이 번갈아 가면서 재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로써 논은 벼 생산기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밭작물도 재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바야흐로 논과 밭작물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
밭작물이었던 콩이 논에 심기는 세상, 시대에 따라 논의 기능은 점점 확대되고 변화해간다. 하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은 우리 삶 속의 스며든 논의 소중함이다. 산소가 늘 곁에 존재하기에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듯, 우리의 땅인 논과 밭도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