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반도체 굴기’ 선언에 이어 미국과 중국 간 무역분쟁까지 격화되면서 한국 수출의 ‘일등공신’인 국내 반도체 업계에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반도체 기술 격차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서 당장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업계는 가까운 미래에 LCD 산업처럼 중국에 1위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면서 현재 13% 수준인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올해 4월에는 시진핑 주석이 이른바 ‘반도체 심장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시 주석의 반도체 심장론 제시 이후 한 달여 만에 중국 정부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가격 담합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올해 7월에는 중국 지방법원이 대만 파운드리 업체 UMC가 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을 상대로 제기한 제품 생산과 판매 중단 소송에서 UMC의 손을 들어줬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 정부의 압박이 마이크론에 집중되고 있지만, 향후 중국 정부의 압박이 마이크론보다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로 선회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분석도 나온다.
국내 반도체 업계도 중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올 7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반도체산업발전 대토론회’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따라잡히는 건 시간 문제”라며 “반도체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중 하나는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올 정도다”라고 우려했다.
중국은 대대적인 정부의 지원 아래 첨단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끌었던 LCD 산업은 지난해 중국에 1위 자리를 빼앗겼다. 2016년 LCD 점유율은 우리나라(34.9%), 중국(28.9%) 순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중국(34.1%)이 우리나라(30%)를 추월했다.
스마트폰도 위협받고 있다. 올해 2분기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수익이 화웨이·오포·비보·샤오미 등 중국 4대 제조사에 처음으로 추월당했다. 수익뿐 아니라 스마트폰 판매량도 삼성전자가 8년째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국 4사를 합치면 삼성전자의 2배에 달한다. 반도체 업계는 국내 반도체 산업이 LCD, 스마트폰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가 발간한 ‘중국 반도체 생태계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6%인 중국 내 전 공정 팹(Fab) 생산능력은 2020년 말에 20%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메모리, 비메모리 등 전체 반도체 5개 중에서 1개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란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인해전술’로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에는 또 앞서는 날이 올 수도 있다”면서 “최근 중국 정부가 보인 행동 하나하나가 당장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에 타격을 줄 순 없지만, 중국의 반도체 굴기 실현을 위한 시간 벌이용으로는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