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무역 긴장을 고조시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무역 전쟁 상대를 유럽연합(EU)으로 바꾸려는 모양새다.
3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이 사실상 EU와 먼저 무역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3월 수입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 관세를 부과했고, EU를 포함한 일부 국가에 관세 부과를 일시적으로 유예했다. 유예 기간은 다음 달 1일자로 끝난다.
소식통은 트럼프 정부가 EU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자 예정대로 관세를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미 행정부는 이르면 31일 철강·알루미늄 고율 관세 부과 안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이날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과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철강·알루미늄 관세 면제에 대해 논의했다. 다만 회담에 구체적인 진전은 없었다. 미국 측은 수출 물량을 제한하는 쿼터에 합의하는 나라에만 관세를 면제할 수 있다는 태도지만 EU는 쿼터 적용에 완강히 반대해왔다. 회담 뒤 EU 집행위원회는 “관세 면제는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로스 장관은 회담에 앞서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에 참석해 “중국은 관세를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이용하지는 않는다”며 “관세를 부과하면 협상하지 않겠다는 나라는 오직 EU뿐”이라고 비판했다. 또 “중국은 관세를 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관세 부과 여부와 상관없이 EU와 협상할 수 있다”며 “EU가 미국산 제품에 많은 관세를 부과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단순히 미국이 EU에 관세를 부과한다고 해서 협상할 수 없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 관세를 적용할 시 EU도 즉각 미국산 제품에 보복 관세를 부과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EU는 미국산 오토바이, 청바지, 버번위스키 등을 포함한 보복 관세 조치 리스트를 작성했다. 이날 로스 장관과의 회담에 참석한 피터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부장관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자”며 “EU는 어떤 종류의 조치든 충분히 기다린 뒤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밝혔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도 “프랑스와 유럽은 무역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지만,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의 이익을 지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세계무역기구(WTO)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며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조치에 WTO가 대응할 것을 요구했다.
EU에서 미국 기업을 대표하는 주EU 미상공회의소는 트럼프 행정부에 자제를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고려하는 관세 부과는 무역 분쟁의 위험성을 키울 수 있고,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대서양을 둘러싼 지역에서 일자리와 경제 성장,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4일 트럼프는 EU를 겨냥해 수입산 자동차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 상무부는 이미 수입차가 미국의 국가 안보를 해치는지를 조사하는 데 착수했다. 이런 관세 조치가 발동될 시 독일 자동차 업체는 직격탄을 입을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EU 간 회담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진단했다. 로펌 베이커맥킨지의 로스 덴튼 무역 분쟁 전문 변호사는 “미국이 무역 정책을 어떻게 다룰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EU는 철강·알루미늄 수입이 미국의 안보를 해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면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에 동의하고 있지 않다”며 “다만 트럼프 정부가 EU를 자극해서 이득이 될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